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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대기업이 총알받이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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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현철 초대 청와대 경제보좌관은 일본통이다. 게이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위원을 지냈다. 일본제철과 닛산자동차의 경영 자문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런 사실을 잘 안다. 문 대통령은 아무 인연도 없는 김 전 보좌관을 그의 책 『저성장 시대,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읽고 “만나자고 했다”고 한다. 『저성장…』은 일본 기업의 사례를 풍부히 담고 있다. 그의 경제사적 지식과 실천적 대안이 문 대통령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J노믹스라는 작명도 김 전 보좌관이 했다. 초대 경제보좌관이야말로 대통령의 경제 철학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받쳐주는 스승이요, 조력자다.

정치와 외교가 뜨거워질수록 #경제는 차갑고 끈끈해야 #나중에라도 돌아갈 수 있다

그런 그가 사흘 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기업을 전선에 세우지 말라”며 “청와대가 기업들과 공개적으로 만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정·경 분리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하게 조언했다. 한·일 관계 전문가들의 의견도 대체로 같다. “정치의 몫과 경제의 몫을 분리해야 나중에 정치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뜨거워져도 경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아는 김 전 보좌관이, 야인의 몸으로 30대 대기업 총수의 청와대 회동을 코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을 향한 충심이자 고언이었을 것이다. 그 역시 행사 취소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기업을 앞장세우는 연출은 삼가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나였다. 대통령은 회동을 강행했고,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커녕, 아예 둘을 꽁꽁 묶어놓았다. 정치와 표를 계산하는 대통령의 셈법으로는, 기업의 입장을 살필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번 회동이 적어도 다섯 가지 점에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첫째, 애꿎은 기업을 경제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문 대통령은 “정부만으로 안 되고 기업이 중심이 돼야 하며 특히 대기업의 협력을 당부드린다”고 했다. 잘못은 정치·외교가 해놓고 경제 더러 책임지라는 꼴이다. 평소 대기업=악으로 보는듯한 반기업 정책과 대기업 적대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

둘째, 돌아갈 다리를 불살랐다. 대통령은 “특정 국가 의존형 산업구조를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며 부품·소재·장비 산업 육성과 국산화를 주문했다. 예산과 세제 지원도 약속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지만 때와 장소가 아니다 보니 사실상 경제전쟁 선포로 들린다. 가뜩이나 달궈진 외교·안보 전쟁이 최악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큰데, 경제를 통한 화해·협력의 실마리마저 끊은 셈이다.

셋째, 잘못되면 대기업 탓이 될 판이다. 기업을 5년짜리 정권과 운명 공동체, 책임 공동체로 엮었다. 별 해법도 없이 대기업에만 짐을 지웠다. 그러다 보니 이번 회동을 놓고 어차피 망친 경제, 내년 총선에 일본 탓, 대기업 탓으로 면피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아니냐는 엉뚱한 얘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넷째,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진솔한 얘기를 듣겠다면서 전경련은 왜 뺐나. 한 번 적폐는 영원한 적폐라서 그런가. 설마 586 청와대의 원리주의, 불통의 리더십을 대내외에 확인시키려는 의도인가. 그래놓고 대통령이 “돌격 앞으로”하는 데 “결자해지, 네가 가라 하와이”라고 말할 간 큰 기업인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미국·중국·북한엔 안 보이던 대찬 결기는 또 뭔가. 리더로서 냉철히 판단한 것인가, 저잣거리의 의심처럼 ‘반일 종족주의’ 때문인가.

다섯째, 순서와 번지수가 틀렸다. 애초 기업인들을 먼저 불러모을 일이 아니었다. 일본통 외교 전문가와 강제 징용 소송 당사자, 원리주의 시민단체, 최초 판결을 내린 김능한 전 대법관 등 사법부 관계자를 모아 협조를 구하고 해법을 들었어야 했다.

이렇게 잘못된 만남이니 청와대 회동을 마친 기업인들이 “안 불러 주는 게 도와주는 것” “정부가 외교적으로 해결해줬으면 좋겠다”라며 뒷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