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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

단발적 쇼에서 실질적 진전으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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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미국인들은 국제 뉴스에 관심 없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6월 30일 일요일 아침은 달랐습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접한 비무장지대(DMZ) 영상에 다들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년의 리얼리티 TV쇼 스타이자 현재는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맞이하러 공동경비구역(JSA)을 반으로 가른 군사분계선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북한에서 만났다는 사실과 자신이 북한땅을 딛은 첫 현직 미국 대통령이란 사실이 영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김정은 판문점 회담은 #미국 내 신랄한 비판 있지만 #협상 재개 물꼬튼 점에선 가치 #한·미 정상 DMZ 공동 방문도 의미

저는 일요일 내내 뉴스와 케이블 채널 그리고 SNS에 올라온 논평이 대부분 부정적이라는 점에 놀랐습니다. 평소 트럼프 대통령의 변칙적 외교 스타일을 좋아하는 지지자들조차 방문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시도했던 어떤 방법도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트럼프 대통령의 비전통적 접근 방식에 기회를 주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지자들의 논평을 제외하고 이번 만남에 대한 비판은 신랄했습니다. 지적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자국민을 잔인하게 다루면서 핵무기를 비축하는 무자비한 독재자에게 미국 대통령이 알랑거리는 모습이 좋지 않다. 이는 김정은에게 엄청난 국내용 선전효과의 승리를 안겨줄 뿐 미국이 대가로 얻는 건 없을 것이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로 김정은 위원장을 위협하다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전략으로 노선을 갑자기 돌렸을 때 일었던 논쟁이 여기선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저는 싱가포르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전의 외교적 금기 사항이었던 것이 많이 정상화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방식은 ‘톱다운(top-down)’이란 이름까지 붙었습니다. 미국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생각이나 성공 전망에 대한 평가를 떠나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 직접 외교하는 것에 대해 정치성향을 넘어 폭넓은 지지를 보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은 위원장과 DMZ에서 찍은 생생한 영상과 공개적 만남에서 보인 능글맞은 모습이 갑작스런 정상회담의 효용성과 도덕성에 대한 열렬한 논쟁에 불을 지폈는지 모릅니다.

DMZ 북·미 회담에 있어 사람들이 간과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노이 정상회담의 실패에 따른 교착상태에서 외교를 재개한 실질적 돌파구였다는 점입니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톱다운 외교의 한계를 드러냈다면 DMZ의 즉흥적인 만남은 한편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다시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취한 맥시멀리스트(타협을 배제하고 최대한 요구하는) 태도에서 후퇴해 비핵화에 있어 보다 점진적인 접근 방식을 논의할 준비가 돼있음을 암시했습니다.  또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를 DMZ 회담에 함께 참여시켜서 힘을 실어줬습니다.

오는 8월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대화의 물꼬를 터줄 장소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환영할 소식입니다. 진전이 있기 위해서는 북한의 협상가들에게 비핵화 단계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권한과 전문 지식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편 미국 측은 북한이 결정을 내리고 약속을 이행할 수 있도록 평양이나 북한 내 다른 장소에서 어쩌면 장기간이 될 회의를 갖는 데 대해 생각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이를 고려하는 과정에서 미국도 난관이 있겠지만 협상의 진전을 위해서는 평양이나 그 근교에서 회의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다양한 계기로 다양한 사람들과 판문점에 다녀왔습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방문객들에게 잊지 못할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처음으로 판문점을 방문한 것은 1975년 평화봉사단 단원으로 한국에 도착한 직후 여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걸어 넘어간 시멘트 턱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끔찍했던 1976년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이후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주한 미국대사로 재직하던 2010년에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후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가장 최근 방문인 지난해 봄에는 스탠퍼드대 학생들과 함께 남북 대화를 촉진시킬 희망의 준비를 봤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6월 30일 그의 ‘친구’ 김정은을 만나기 위해 북한에 잠시 들른 역사적 사건은 스타일과 내용으로 봤을 때 제가 상상했던 미국 대통령의 첫 방북 장면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협상이 시작된 것이라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미국에서는 주목 받지 못했지만 못지않게 의미 있는 대목은 바로 이번 회담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동맹국으로서 결의와 화해의 메시지를 안고 함께 DMZ를 방문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매우 고무적입니다. 이번 판문점의 장면들이 단지 쇼에서 끝나지 않고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의 실직적 성과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일 것입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