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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도록 정교한 후원금 관리 시스템의 아픈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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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희경의 행복 더하기(10)

컴패션 수혜국에서 찍은 사진. 후원금이 어떤 항목으로 언제, 얼마가 사용됐는지 반드시 영수증을 붙여 기록을 남긴다. 매월 정산해서 국제컴패션의 승인을 받는다. [사진제공 컴패션]

컴패션 수혜국에서 찍은 사진. 후원금이 어떤 항목으로 언제, 얼마가 사용됐는지 반드시 영수증을 붙여 기록을 남긴다. 매월 정산해서 국제컴패션의 승인을 받는다. [사진제공 컴패션]

‘미국의 조직은 시스템이 일하고 한국은 사람이 일한다.’
예전에 조직문화와 관련된 어떤 책에서 읽은 글인데 이전 기업에서 일할 때 무척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선 누가 결재를 올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내부마케팅의 중요성을 실감하곤 했다. 반면에 컴패션에 와서 미국식 조직의 시스템을 경험했다.

한 후원자의 인터뷰가 ‘작동하는 시스템’을 잘 설명해준다. 30여년간 범인 검거에 힘써 온 검사장 출신의 후원자가 수혜국인 볼리비아 컴패션을 다녀온 이야기다. 이 후원자는 지금은 수많은 디지털 증거자료를 이용해 의뢰한 기업을 감사하는 기관의 대표다. 그는 볼리비아에서 보고 온 많은 영수증 파일과 어린이 성장 파일을 ‘시스템’이라고 이야기했다.

후원자는 현지에서 본 한 명, 한 명 어린이들의 상세한 성장기록과 후원금 사용 장부를 보며 매우 놀랐다고 했다. 그 외지고 험한 빈민가에서 장부들은 미국회계 기준으로 작성 관리돼 있었다. 각종 병원 기록, 상담기록, 후원금 사용 내용이 꼼꼼히 구비돼 있다며 감탄했다. 한국의 많은 기업을 감사했지만, 이렇게까지 각종 장부가 서로 교차해서 데이터를 체크할 수 있게 돼 있는 회사는 별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야말로 탁월한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는 것이다.

센터에서 양육 받는 어린이들의 개인 파일에는 구체적인 성장 기록이 작성돼 있다. 자료는 자물쇠가 잠긴 캐비닛이나 자료실에 보관한다. [사진제공 컴패션]

센터에서 양육 받는 어린이들의 개인 파일에는 구체적인 성장 기록이 작성돼 있다. 자료는 자물쇠가 잠긴 캐비닛이나 자료실에 보관한다. [사진제공 컴패션]

“볼리비아 컴패션 어린이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의 부모나 형제들은 대부분 범법자입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은 빈민가이고 우범지역이고 매우 가난합니다. 매일 범죄를 보고 자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갱단의 총격전이 수시로 벌어지는 지역에 있는 조그마한 컴패션 지역본부를 범죄 청정지대로 만들어 운영할 수 있을까요?” 후원자의 감탄 어린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 도중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시스템이네요.” 후원자 말에 따르면,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시스템을 통해 그곳 직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견제할 수 있게 됐다. 이어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기까지 한국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다”고 했다. 바로 한국의 수혜국 시절 이야기다.

1952년,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컴패션을 통해 엄청난 후원금이 한국으로 전달되었다. 보육원과 가정, 학교, 교회, 지자체 등 많은 단체가 그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컴패션이 한국을 도왔던 그 시기의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00 보육원에서 비리를 저질렀으므로 후원자인 미국인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고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다.

한 어린이의 개인 파일 내용. 어린이에게 맞춤 양육을 하기 위해 가족의 구체적인 사항들과 어린이의 관심분야까지 확인해 기록하고 있다. [사진제공 컴패션]

한 어린이의 개인 파일 내용. 어린이에게 맞춤 양육을 하기 위해 가족의 구체적인 사항들과 어린이의 관심분야까지 확인해 기록하고 있다. [사진제공 컴패션]

국제 컴패션은 한국에서 어린이를 도울 때 작지만 다양한 비리 사례를 통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의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제는 후원국으로 12만명의 어린이를 돕는 한국으로 거듭났기에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40여년간 한국의 수많은 단체를 도우면서 얻은 다양한 사례가 지금의 운영시스템을 완성했다니 아이러니하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어딘가 부족하고 불완전할 수 있다. 사람 자체가 실수도 잦고 모순덩어리다. 나 역시 이성을 중요시하면서도 중요한 결정일수록 마지막에는 직감을 따르게 된다. 대니얼 카너먼 같은 ‘비이성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을 주장하는 심리학자들의 이론이 갈수록 지지를 받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데이터나 시스템을 구축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고 안전할 것 같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양육 받는 어린이의 숫자를 속여 후원금을 횡령한 고아원에 관해 보도한 1968년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양육 받는 어린이의 숫자를 속여 후원금을 횡령한 고아원에 관해 보도한 1968년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그런데 여기까지 살아보니, 희한하게도 내가 힘을 받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결국 사람의 관심과 손길이었다. 힘내라고 밥을 사주거나, 커피 한 잔으로 긴장을 풀어주거나, 꼬박꼬박 언제 집에 오느냐고 묻는 딸의 문자가 바쁜 일상에 힘이 된다.

자신을 시스템에 회의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던 조정민 목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시스템도 사람의 부패를 이겨내지 못하더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랬던 그가 필리핀 컴패션 센터를 방문해서 보고 “역시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이 중요하다. 헌신하는 사랑에 붙들린 사람들이 움직이는 시스템은 다르더라”고 했다.

정교한 시스템은 정말 필요하다. 효율과 효과를 높여 준다. 하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사람이 중요하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갈 수 있는 사람의 온기, 진짜 변화는 시스템을 넘어서는 그것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조희경 한국컴패션 후원개발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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