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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 주변 하이에나들…땅 보여주고 고스톱 사기까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26)

건축사 사무소에서 상담과 가설계를 받는 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마땅한 일이다. 우리가 법률사무소에서 무료로 상담받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건축주 입장에서는 도면도 없이 계약을 하기 어렵기에, 건축사 사무소에서는 계약을 따내기 위해 무료로 가설계를 제공하는 관행이 있다. [사진 pixabay]

건축사 사무소에서 상담과 가설계를 받는 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마땅한 일이다. 우리가 법률사무소에서 무료로 상담받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건축주 입장에서는 도면도 없이 계약을 하기 어렵기에, 건축사 사무소에서는 계약을 따내기 위해 무료로 가설계를 제공하는 관행이 있다. [사진 pixabay]

건축설계는 초기 컨셉 디자인이 매우 중요하다. 땅마다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고유특성이 있다. 법적 제약조건, 향 조건, 도로, 지형, 주변 여건 등을 복합적으로 검토하고 기본 방향을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작업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건축주는 거의 없다. 일단 디자인이 진행되고 나서도 다른 이유로 계약을 미루거나 진행 자체를 중단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도 그동안 진행된 디자인에 대한 대가를 받기 힘들다.

병원에 가서 상담이나 기본 진료를 무료로 할 수 없고, 변호사 사무소에서 단 10분도 무료 상담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건축주들은 건축사 사무소의 주요 디자인을 공짜로 해주는 줄 안다. 이러한 불합리한 관행은 지식 재산권에 대한 건축주의 무지라기보다 어쩌면 건축사 간의 경쟁이 만든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 건축 과정인 ‘가설계’가 공짜인 이유

각종 법규를 검토하고 대지 여건을 분석하고 건축사의 경험과 디자인 역량을 집약해 표현한 기본도면을 ‘가설계’라 부른다. 어느 용어사전에도 없는 이 가설계는 어쩌면 건축설계 전체과정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컨셉을 표현해 놓은 도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가설계는 무료로 제공된다.

한편으로 건축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도면이 없는 상태에서 설계 계약을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규모검토가 필요하고 건물의 연면적, 배치도, 평면도, 형태를 표현한 도면이 있어야 본격적으로 설계를 진행하기 위한 계약을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계약을 성사시키려면 이 단계까지의 도면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건축설계를 의뢰하러 건축사 사무소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우선 지인의 소개로 방문한 건축주 중에 자기 소유 땅에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떤 용도의 건물을 짓겠다고 나름대로 결정하고 오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일이 쉽다.

건설회사는 건축사 사무소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안정적인 건축주다. 하지만 대부분 이들은 연고가 있는 사무소에 일을 맡긴다. 그래서 시장에 갓 뛰어든 건축사나 중소형 사무소는 이들에게 일을 수주받기 어렵다. [사진 pixabay]

건설회사는 건축사 사무소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안정적인 건축주다. 하지만 대부분 이들은 연고가 있는 사무소에 일을 맡긴다. 그래서 시장에 갓 뛰어든 건축사나 중소형 사무소는 이들에게 일을 수주받기 어렵다. [사진 pixabay]

법적으로 건축주가 원하는 용도와 규모가 가능한지 서류를 검토해 별 이상이 없으면 현장답사를 하고 기본계획을 진행한다. 기본계획이 완성되면 계약서를 작성하고 본격적인 설계를 진행할 확률이 높다. 자체 사업이 많은 건설회사는 가장 안정적인 건축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건설회사는 자회사처럼 연결된 건축사 사무소에서 일을 수행한다. 연고가 없는 건축사 사무소에서는 그림의 떡이다. 언제부턴가 공공건축은 현상설계공모가 일반화했다. 젊고 유능한 건축사들이 일을 수주하기 위해 현상설계공모에 도전장을 낸다. 그러나 현상공모는 늘 심사과정에서 뒷말을 남긴다. 특히 국내 굴지의 건축사 사무소끼리 각축을 벌이는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더 시끄럽다. 중소형 사무소는 이런 싸움에 감히 끼어들 엄두를 내기 힘들다.

시행사는 건축사 사무소의 단골손님이다. 시행사는 땅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개발해서 이익이 얼마나 가능한지 먼저 검토해보고 만족스러우면 땅 매입 작업부터 시작한다. 이런 시행사는 한 달에도 몇 건씩 수익성 검토를 의뢰해온다. 법규와 규모를 검토하고 투자비와 임대 혹은 분양수익을 비교해 투자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투자 규모가 크다 보니 신중히 처리해 검토한다. 건축사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된다.

이렇게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주야로 땅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상당수가 1인 시행사로, 주머니 사정이 어렵다. 그들에게 건마다 검토비를 요구하기도 곤란하다. 수년간 수십 건을 검토하고도 한 건도 성사가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한 건 성사시키고 인생 반전을 이룬 시행사가 종종 나타나므로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땅을 보러 다닌다. 그들의 애환을 듣다 보면 검토서를 공짜로 해 줄 수밖에 없다.

전원주택 단지 설계를 의뢰하고자 한 시행사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 이들은 단지가 들어설 땅을 보여주고 식사 자리로 이끌어 고스톱을 치자고 유도했다. 이후 시행사의 연락은 두절됐다. (이 사진은 기사와 연관이 없음) [중앙포토]

전원주택 단지 설계를 의뢰하고자 한 시행사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 이들은 단지가 들어설 땅을 보여주고 식사 자리로 이끌어 고스톱을 치자고 유도했다. 이후 시행사의 연락은 두절됐다. (이 사진은 기사와 연관이 없음) [중앙포토]

가까이 지내는 건설회사 대표의 소개로 시행사를 한다는 여성들이 사무소를 찾아온 적이 있다. 전원주택 단지 설계를 의뢰하고 싶다고 해 사들인 땅을 보러 가게 됐다. 지형이 아름다운 땅이었다. 상당히 규모가 큰 전원주택 단지를 조성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포크레인 몇 대가 땅을 정리하고 있었다. 현장을 보고나니 마침 점심시간이 되었고 현장 인근 닭백숙 집으로 가게 됐다. 대개 이런 집에서는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같이 간 여성들이 우리도 심심하니 잠깐 고스톱을 치자고 했다. 그날 건설회사 대표가 고스톱 자금을 부담하기로 하고 시작한 심심풀이 고스톱이었는데 30분 동안에 예상치 못하게 많은 돈을 잃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그 여성들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현장답사를 했던 그 땅도 그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땅이었다. 건축사를 찾아다니면서 사기 고스톱 사업을 하는 조직을 만난 것이었다.

건축 설계 아이디어 절도범들

건축사 사무소를 방문하는 고객 중에 처음부터 건축사를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군데 건축사 사무소에 동일 설계 건을 의뢰해 컨셉 디자인을 받아본다. 그중에 좋은 아이디어를 취합해 가장 저렴하게 설계하는 업체에 의뢰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디어 절도행위에 해당한다. 요즘은 지식재산권에 대한 기준에 많이 강화돼 소송까지도 불사할 수 있다. 그동안 이런 부류의 건축주는 아주 당당하게 건축사의 아이디어를 훔쳤다.

건설 경기가 장기 불황이다. 특히 중·소형 건축물의 수요가 사라졌다. 그 결과 소형 건축사 사무소의 일거리가 사라졌다. 요즘처럼 불경기가 지속할 때는 건축사의 경쟁이 더 치열해진다. 이런 시장 환경에서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건축사 사무소를 찾는 고객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손웅익 프리랜서 건축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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