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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글로벌 경제전쟁, 정부의 실력과 독기를 길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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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경제 에디터

이상렬 경제 에디터

우리 기업들이 애처롭다. 인정사정없는 경제전쟁, 무역 보복의 포탄을 온몸으로 맞아내고 있다.

일본 보복조치 여러 채널 확인 #다급한 기업인들만 동분 서주 #정작 정부대응 치밀하지 못해

일주일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하얏트호텔 간담회에 대기업 총수들은 약속 시간 2시간 전에 미리 도착했다. 누가 수퍼 파워 미국 대통령의 호출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 LG는 총수인 구광모 ㈜LG 대표 대신 권영수 부회장이 대리 참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LG유플러스가 쓰고 있는 화웨이 장비를 문제 삼을 경우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를 지낸 권 부회장이 부득이한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 며칠 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5대 그룹 총수들은 방한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를 한밤에 승지원에서 만났다. 당초 짜놓았던 총수들과 왕세자의 만찬 일정이 문재인 대통령과 왕세자의 친교 만찬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것은 만찬을 기다리고 있던 총수들이었다. 사우디 실권자인 왕세자를 붙잡아야 제2의 중동특수 기회가 열린다는 절실함이 총수들을 ‘밤중 차담회’로 달려오게 했다.

이 와중에 터져 나온 일본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는 기업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 산업의 급소를 겨냥한 아베 정부의 공세는 위기가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돈을 빼내 한국 경제에 치명상을 안긴 외환위기 당시의 행태를 연상시킨다.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간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움직임은 총수들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서소문 포럼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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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급한 과제가 있다. 우리 정부의 실력과 독기를 키우는 일이다. 일본에 대한 정부의 첫 대응은 1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의 “향후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였다. 정작 정부가 일본 측에 양자협의를 공식 요청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형식적으로라도 양자협의를 앞세워 일본의 진의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WTO 행을 포함한 순차적 대응 계획을 밝혔으면 어땠을까. 상대가 옹졸하다고 우리까지 덩달아 흥분할 일이 아니다.

정부 일각에서 일본의 무역보복이 참의원 선거를 앞둔 아베 정권의 도발이라는 시각이 일찌감치 흘러나오는 것도 우려스럽다. 아베 정권의 저의가 그렇다 해도 그걸 콕 집어 얘기하면 이 순간을 노리고 칼을 갈아온 일본 우익을 자극할 소지가 다분하다. 상대방의 패를 알고도 아는 티를 내지 말아야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다.

정부의 경제운용도 미덥지 못한 구석이 여럿이다. 그중 하나가 경기 진단과 전망이다. 정부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올 성장률 전망치를 2.4~2.5%로 당초보다 0.2%포인트 낮췄다. 경제 컨트롤타워인 홍남기 부총리는 브리핑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우리 경제 성장률을 수정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경제 분석이 정교하지 않음을 자인한 꼴이다.

주52시간제의 충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주52시간제 확대 시행으로 내년 성장률이 0.3%포인트 떨어질 수 있다고 분석한 곳은 정부가 아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였다. 지금처럼 내수가 부진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기업들은 추가적인 인건비 부담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분석력이 떨어지니 전망이 바로 나올 수 없다. 1분기 성장률이 -0.4%로 고꾸라지는데 청와대와 경제부처가 통계 확인 전까지 공유한 성장률 전망치는 플러스 0.3%였다. 이러니 2%대 중반 성장을 자신하는 정부보다 2% 달성이 어렵다는 민간 전문가들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올 상반기 일본 통화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우리 측에 일본계 자금이 빠져나가도 한국 금융시장이 괜찮을지를 넌지시 타진해왔다. 일본이 한국 경제에 타격을 입힐 보복 조치를 다각도로 검토해온 것은 여러 채널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지금 국민들이 불안한 것은 일본의 공세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위기감 부재(不在)와 역량 미흡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타격을 입는 정보통신(IT)업체 고위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알아보니 일본이 우리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마지막까지 괴롭힐 것은 분명하다. 그때까지 어떻게 버틸지가 관건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우리 기업을, 산업 기반을 지키겠다는 독기를 품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 더는 국민을 실망시키지 말라.

이상렬 경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