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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고 없애면 ‘혁신교육’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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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사회부에디터

김원배 사회부에디터

“앞으로 한국이 집중해야 할 것은 첫째도 인공지능(AI), 둘째도 인공지능, 셋째도 인공지능이다.”

지난 4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말이다. 손 회장은 교육·정책·투자·예산 등 AI 분야에 대한 전폭적 육성을 제안했다고 한다. AI 육성을 위해 첫머리에 오른 게 바로 교육이다.

하지만 한국 교육의 현주소는 어떤가. 미래 인재를 키워낼 고민보다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의 존속을 놓고 논쟁 중이다. 재지정 평가에서 탈락한 상산고와 안산동산고에 대한 교육청 차원의 청문이 8일 열린다. 9일엔 서울교육청이 13개 자사고를 대상으로 한 평가 결과를 발표한다. 서울의 기존 자사고에선 기준점수인 70점에 미치지 못하는 곳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선 자사고가 고교서열화와 일반고 황폐화를 불러일으키는 주범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자사고가 우수학생을 독점해 일반고가 황폐화됐다는 주장을 뒤집어 보면 이 역시 “학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최고”라는 발상의 연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을 끌어 올리고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을 키울 수는 없는가.

자사고를 없앤다고 일반고가 좋아질지도 의문이다. 아마도 자사고가 없어지면 문재인 대통령이 폐지를 공약한 외국어고, 국제고가 타깃이 될 것이다. 그다음엔 강남 8학군이 문제라고 할 것이다.

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는 진보 교육감들은 혁신학교에 공을 들이고 있다. 다양한 활동과 토론식 수업을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일반학교보다 더 많은 지원금을 준다. 서울교육청은 지난 4일 공모를 받아 혁신학교 8곳을 지정했다. 서울의 혁신학교는 221곳인데 이 중 164곳이 초등학교다. 중학교는 42곳, 고교는 15곳에 그친다. 중·고교에선 혁신학교를 꺼리는 학부모가 적지 않다. 바로 학력저하 우려 때문이다.

지난해 일반학교의 토론 수업을 지켜본 적이 있다. 흔히들 주입식·암기식보다 토론식 교육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수업은 그렇다고 보기 어려웠다. 일단 토론 수업을 하기엔 한반 학생 수가 많았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조별로 나눠 토론하다 보니 산만해졌고 선생님 한 명이 혼자 이끌어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차라리 기본 원리나 양측 주장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학부모들이 혁신학교에 대해 가지는 불안감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혁신학교가 성공하려면 이런 불안감을 불식시키고 학생과 학부모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엔 대학입시라는 현실이 있다. 이를 무시하고 이상만 추구하면 교육 수요자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젠 당위론을 말하기보다 성과로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다. 혁신학교라고 부른다고 혁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은 사회 전반은 물론 국제질서도 바꿀 것이다. 문제는 학부모나 교육자도 새로운 인재를 어떻게 키울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미래 인재를 키우는 방법은 다양할수록 좋다. 자사고도 새로운 평가 기준을 제시해 문제점이 있다면 스스로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

학생과 학부모는 바보가 아니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사고에 몇배나 되는 학비를 내고 다니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것 핑계 대지 말고 내가 잘하는 것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이 자발적으로 따라오도록 하면 된다. 이걸 무시하고 학교의 존폐를 놓고 ‘몇점 모자라 탈락’ 같은 숫자 놀음만 한다면 한국 교육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김원배 사회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