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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다양성, 21세기의 획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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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석만 이노베이션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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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세기 이탈리아는 유럽의 중심이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군의 길목이었고 각지에서 거둬들인 교회의 자금이 한 데 모이는 곳이었다. 특히 상업이 발달한 이탈리아의 북부 도시 볼로냐엔 열정 가득한 청년들이 몰렸다. 하지만 복잡한 상법이 젊은 상인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법률가를 초청해 공부했다. 나중엔 논리학, 수사학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이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오늘날 대학의 어원이 된 ‘universitas(자치조직)’이다. 이렇게 세계 최초의 대학이 탄생했다.

학교가 존재하는 것은 학생의 관심과 사회의 필요 때문이다. 볼로냐대는 학생이 직접 교수를 뽑고 실력이 떨어지거나 불성실하면 내쳤다. 수요자 중심의 다양성과 자율성이 교육의 핵심 원리였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함께 교육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19세기 성립된 근대 학교체제는 기계적 스킬을 가진 공장 노동자를 키워내고 근대국가의 형성에 따른 국민 공통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평등하고 획일화된 교육을 추구했다.

노트북을 열며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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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은 근대교육의 우등생이었다. 누군가 혁신하면 패스트 팔로워로 재빨리 따라잡고 시장을 점유했다. 그러나 21세기엔 퍼스트 무버만 살아남는다. 현 정부의 경제 슬로건처럼 ‘혁신’하지 않으면 ‘성장’도 없다. 문제는 자유와 다양성이 배제된 토양에선 혁신의 꽃이 피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리콘 밸리가 혁신의 요람이 된 것은 중세 이탈리아가 상업의 중심이 된 것과 같다. 시장의 필요가 상품을 만들고 자유와 다양성이 혁신을 일으킨다.

내일 평가 결과가 나오는 서울의 13개 자사고도 마찬가지다. 진보 교육감들은 ‘평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획일화된 교육은 학생의 다양한 니즈를 담기 어렵다. 김대중 정부가 처음 자사고를 도입한 이유도, 역대 정부가 ‘학교 다양화’라는 정책 기조를 유지한 원인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를 다양화하기는커녕 있는 것도 없애지 못해 안달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은 공교육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때그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부를 사교육에 맡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여전히 학교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학생의 적성과 소질만큼 학교의 종류가 많아져야 개천에서 용 날 가능성이 커진다. ‘학교 일원화’는 개천에서나 통할 수영 스킬만 가르쳐주고 가재·개구리로 사는 것도 행복하다고 주입하는 산업시대의 교육과 다를 게 없다. 21세기 미래로 가려는 아이들을 ‘19세기 교육 유령’이 발목 잡고 있다.

윤석만 이노베이션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