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보복 뒤늦게 수습책 마련 나섰지만…'한 방' 못찾는 정부

중앙일보

입력 2019.07.04 16:51

업데이트 2019.07.04 21:42

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소재 등의 수출을 규제하는 경제보복에 나서자 한국 정부가 급하게 수습책 마련에 나섰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4일 CBS라디오에 출연해 일본의 수출규제는 명백한 경제보복”이라며 “일본에게 상응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일본의 경제보복을 두고 정부 당국자의 입에서 맞대응에 나설 것이란 입장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기업인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주요 대기업 대표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기업의 협조를 당부했다. 2019.7.4/뉴스1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기업인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주요 대기업 대표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기업의 협조를 당부했다. 2019.7.4/뉴스1

홍 부총리는 “(일본은)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강제징용에 대한 사법 판단에 대해 경제에서 보복한 조치라고 명백히 판단한다”며 “실무 검토가 끝나는 대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시기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일방적인 조치에 대해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일본 측이 경제 제재 보복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다양한 대응 조치를 또 일본에게 상응할 수 있는 조치를 정부가 강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소 자극적인 발언을 삼가는 홍 부총리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상당히 강도 높은 발언이다. 내부적으로는 일본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등 반일감정이 거세지고, 외부적으로는 일본이 규제 품목을 확대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면서 ‘앞으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기획재정부는 이와 함께 구윤철 2차관 주재로 회의를 열고 일본 수출규제 대상 3개 품목과 추가 제재 가능한 품목을 선정해 가장 빠른시간 내에 자립화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통상정책의 컨트롤타워인 통상교섭본부도 나섰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이번 일본의 조치는 한국만을 특정해, 선량한 의도의 양국 민간기업 간 거래를 제한하는 것으로 바세나르체제의 기본지침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바세나르체제 기본지침은 ‘모든 회원국이 특정 국가나 특정 국가군을 대상으로 하지 않을 것이며, 선량한 의도의 민간거래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모두발언하는 유명희 본부장   (서울=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일본의 수출통제 관련 관계기관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19.7.4   superdoo82@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모두발언하는 유명희 본부장 (서울=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일본의 수출통제 관련 관계기관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19.7.4 superdoo82@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유 본부장은 “일본이 ‘신뢰 훼손’이라는 자의적 주장을 하면서 수출제한 강화조치를 발동하는 것은 전략물자 수출통제 취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라고도 했다. “한국은 전략물자 4대 수출통제체제 및 3대 조약에 모두 가입한 국가로서 어느 나라로부터 지적을 받은 적이 없는 모범국가”라는 게 유 본부장의 설명이다. 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ㆍ1994) 제11조를 인용해 WTO 규범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앞서 산업부는 지난 3일 일본 경제산업성에 양자협의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이처럼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뾰족한 맞대응 카드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게 고민이다. 양국 간 교역 구조나 각 부분의 산업경쟁력을 놓고 봤을 때 일본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한방’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당장 정부가 천명한 WTO 제소는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 법률 검토 자체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WTO 분쟁 해결의 첫 절차인 양자협의 과정만 길게는 1년까지 걸릴 수도 있어서다.

전면적인 ‘경제 전쟁’으로 확전하는 것을 무릅쓰고, 반도체 등 국산 제품의 일본 수출을 제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으로 수출하는 품목들은 다른 국가 제품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점에서 타격을 주는 데 한계가 있다.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 ‘일본관광 자제’ 등의 여론이 형성되고 있지만, 이는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데다, 양국 간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질 수 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의 보복 조치로 일본도 타격을 받겠지만, 양국 간 보복전이 장기화할 경우 우리 피해가 더 클 수 있다는 것이 문제”라며 “정부에서 ‘수입선 다변화’와 ‘핵심 품목 국산화’ 등의 대책을 언급했지만, 이 역시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우려했다.

올해 초부터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에 들어갈 것이라는 낌새가 있었는데도, 우리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는 비난도 나온다. 홍 부총리는 “해당 내용을 꾸준히 점검해 왔고 손 놓고 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정부의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산업부의 통상현안대응단 태스크포스(TF)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제한을 공식 발표한 1일 구성됐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해 11월에도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수출 물량을 승인하지 않다가 이틀 만에 허가한 바 있다. 당시 반도체 업계에서는 일본이 수출 규제를 실제 실행할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올 3월에는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가 “강제징용 관련 한국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 기업 자산 압류가 실제 행해지면 한국에 대한 보복 조처를 할 수 있다”고 경고까지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오래전부터 일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 정부에 여러 번 내용을 전달했다”라며 “그런데 지금 정부는 일본의 보복 조치에 대비해왔다는 말만 반복할 뿐,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외교부의 대일 채널 역시 경제보복과 관련해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정치권의 대화 채널도 막혀 있어 외교정치적인 해결도 쉽지 않다.

‘일본통’ 학자로 꼽히는 박명섭 성균관대 글로벌 경영학과 교수는 “일본 정부가 이번 무역 규제를 단행하기 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정황이 포착된다”며 “우리가 WTO에 제소하는 것도 일본이 예상한 시나리오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시나리오별로 작전을 갖춘 일본에 감정적ㆍ즉흥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일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라며 “딱 부러지는 해법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세종=손해용·김기환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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