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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에 '암살' 권했던 약산 후손 "김원봉 서훈 집착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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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약산 행적에 대한 오해와 진실, 조카가 말하다

경남 밀양시 내이동 해천마을은 훈·포장을 받은 독립운동 유공자 26명을 배출한 곳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2층 건물이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에 지어진 의열기념관이다. [예영준 기자]

경남 밀양시 내이동 해천마을은 훈·포장을 받은 독립운동 유공자 26명을 배출한 곳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2층 건물이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에 지어진 의열기념관이다. [예영준 기자]

얕은 실개천을 따라 나지막한 가옥들이 줄지어 있는 경남 밀양시 내이동의 해천마을은 겉보기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동네다. 그런데 이곳 주민들의 긍지와 자부심만큼은 하늘을 찌른다. 밀양시청 소속의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밀양 출신으로 훈·포장을 받은 독립운동가가 81명인데 그중 26명이 반경 500m 남짓한 이 동네 일대에서 배출됐다”며 “단위 면적당 ‘훈장 밀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걸음 움직일 때마다 ‘애국지사 ○○○의 생가터’라 쓰인  비석이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문 대통령에 영화 ‘암살’ 관람 권유 #11월 순수 민간 기념사업회 출범 #재평가 이뤄지기엔 시간 더 필요 #약산 동생 4명, 보도연맹으로 희생

최근 들어 서훈 여부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의 주인공이 된 약산 김원봉도 1898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다수도 약산과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다. 의열단의 창단 단원 10명 가운데 4명이 밀양 출신이었다. 가령 1992년 훈장(독립장)을 받은 윤세주는 김원봉과 바로 옆집에서 나고 자란 죽마고우이자 평생동지였다. 조선의용대 1지대 정치위원이던 그는 1942년 중국 산시성 타이항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밀양시는 해천마을에 항일 테마거리를 조성하고 김원봉의 생가터에 있던 건물을 매입해 지난해 3월 ‘의열기념관’을 열었다. 최근 논란과 함께 관람객이 늘어 주말마다 외지인을 중심으로 300여명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 셋째가 김원봉.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 셋째가 김원봉.

김원봉은 남과 북 양쪽에서 잊힌 존재였다. 북한에서 그의 이름은 1958년 10월을 끝으로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남에서도 그의 이름은 ‘암기과목’ 국사 교과서에 의열단장이란 직함과 함께 등장할 뿐이었다.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건 2015년 영화 ‘암살’이 흥행에 성공한 뒤였다.

당시 야당 정치인이던 문재인 대통령도 약산의 삶에 짙은 감동을 받은 관객 중 한명이었던 듯하다. 문 대통령은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는 소감을 남겼다. 문 대통령의 관심은 최근의 서훈 논란을 거쳐 현충일 발언까지 계속 이어졌다. 취재 결과 문 대통령에게 영화 ‘암살’을 보라고 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원봉의 몇 안 되는 혈육(생질)인 김태영 약산 장학회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여사의 아들로 1984년 미국에 이민 간 사업가다. 약산 기념사업회 발족 준비 등을 위해 국내에 머무르고 있는 김 회장과 연락이 닿았다.

문 대통령 발언 이후 김원봉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2015년 지인을 통해 (문 대통령을) 한 차례 만나 약산의 생애에 대해 내가 아는 바를 설명하고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사전 지식이 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때마침 상영 중이던 영화 ‘암살’을 보라고 권유했더니 곧바로 관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현충일 연설문을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해 또 한 번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이게 된 것이 안타깝다. 그 뒤 나온 얘기 중에는 팩트(사실)보다는 근거 없는 오해와 비난이 더 많다. 약산에 대한 객관적 연구와는 거리가 먼 정치공방의 소재로 활용되는 것이 후손 입장에선 송구스럽다.”
김태영

김태영

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식에서 “광복군에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군사적 역량은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발언 직후 일각에선 “김원봉은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의 뿌리였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과연 역사적 팩트는 어느 쪽일까.

김원봉은 1938년 중국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파괴·암살을 통해 일제에 타격을 주고 조선 민중의 궐기를 촉발하자던 1920년대의 의열단 투쟁에서 더 나아가 조직된 무장으로 일제를 타도해야 된다고 보고 중국 대륙 최초의 조선인 군대를 만든 것이다. 문제는 조선의용대가 이후 두 갈래로 분리됐다는 점이다. 김원봉은 1940년 의용대의 주력을 화베이(華北) 지방으로 북상시키고 자신이 머물던 충칭(重慶)에는 총대(본부 대원) 40여명만 남겼다. 화베이로 향한 의용대는 뤄양을 거쳐 타이항산으로 이동해 중국 공산당 부대인 팔로군의 지휘 아래 편입된다. 명칭을 조선의용대에서 조선의용군으로 바꾼 이 부대는 1945년 일제 패망 후 동북지방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간다. 중국 공산당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조선인 김무정은 6·25 때 인민군 부대를 이끌고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 “김원봉은 인민군의 뿌리”란 반론이 나온 연유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팩트는 아니다. 이미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단절된 이후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김원봉 연구의 권위자인 김영범 대구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조선인이 많이 살던 화베이로 보내 더 많은 대원을 규합해 무장 조직을 키우려고 했다. 만주를 거쳐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도중에 중국 공산당의 포섭 공작, 국공합작을 깨뜨리려 한 국민당에 대한 불신 등이 겹쳐 타이항산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원봉은 자신의 병력을 빼앗긴 셈이 됐다.”

김원봉이 충칭에서 거느리고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 대원 40여명은 광복군에 편입됐으나 주축이 되진 못했다. 국군 창설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란 주장도, 김원봉이 인민군의 뿌리란 주장도 모두 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인 셈이다.

김원봉은 1948년 김구·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그대로 남아 북한 정부의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냈다. 그가 6·25 기간에 노력훈장을 받은 점을 들어 남침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김영범 교수는 이에 대해 “훈장을 받은 건 전쟁 수행의 역할이 아니라 보리 파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등급도 최고급인 국기훈장이 아니라 그 아래였다. 김일성은 독립운동가로 명망 높은 약산을 끌어들여 정권의 정통성을 높이려 했지만 군사 분야 등 핵심적인 권력은 주지 않았다. 김일성의 권력이 강고해지면서 약산은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김원봉이 북한 정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규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약산에 대한 서훈이 이뤄질 수 없는 것도 이 점과 관련돼 있다. 다시 김태영 회장에게 물었다.

유족으로서는 훈장을 받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서훈에 집착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 분단으로 인한 상처와 냉전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지 않나. 약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몇 년 전부터 구상해 오던 것인데 오는 11월 의열단 창립 100주년을 맞아 약산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려 한다. 정부 지원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사비로 하면 된다. 법 규정에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의 기념사업회는 재단법인으로 등록할 수 없다는데 이 또한 개의치 않는다. 순수하게 민간차원의 기념사업을 할 생각이다.”

김 회장은 “약산의 동생인 외삼촌 4명이 보도연맹에 연루돼 숨지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던 나도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한때 약산의 피붙이란 사실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약산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며 “내 개인이 그랬던 것처럼 약산에 대한 재평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 생각한다”며 인터뷰를 맺었다. 대신 그는 “독립운동사에 남긴 약산의 업적만은 반드시 기억해 달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이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서울시청 청사에 걸렸던 대형 게시판의 문구와 겹쳐졌다. “잊지 않는 것이 최고의 훈장입니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