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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민족주의와 포퓰리즘 앞에 자유주의 세계질서 무너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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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저무는 미국 중심 국제질서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길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70여 년, 짧게는 탈(脫)냉전 이후 3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일컫는 국제정치 용어다. 냉전 시기에는 서방 자유 진영의 리더로, 냉전 종식 이후에는 단극(單極) 체제의 유일 패권국으로 미국은 세계질서를 주도해 왔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과 함께 모든 게 달라졌다. 미국이 심혈을 기울여 쌓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공든 탑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미국이 자유주의 질서 몰락 자초 #이라크전과 극단적 세계화가 원인 #트럼프만의 잘못으로 보기 어려워 #미·중 간 경쟁·대결 질서 불가피

보호주의 반대 못한 오사카 G20 정상회의

지난주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미국이 설계하고, 시공하고, 관리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90%를 차지하는 주요 선진국 및 신흥국 정상 20명과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떠받치는 9개 국제기구의 수장들이 참석한 다자(多者) 모임이었음에도 회의장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는 미·중 무역전쟁이라는 양자(兩者) 이슈였다. 폐막과 함께 G20 정상들이 채택한 공동성명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보호무역에 반대한다’는 문구가 들어가지 못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일방주의와 보호주의 노선을 노골화하고 있는 미국이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자유 진영의 패권국이 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인권·법치 등 보편적 가치, 자유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각종 제도와 규범을 통해 미국의 이익에 최적화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했다. 그것이 다른 나라들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소련의 몰락으로 미국이 전 지구적 패권국이 되면서 미국의 이미지를 본떠 만든 자유주의 질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글로벌 질서로 확장됐다. 그로부터 약 한 세대 만에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생사(生死)의 기로에 선 것이다.

‘자유주의 세계질서, 편히 잠드소서’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CFR) 회장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사망 진단을 내렸다. 지난 70여 년에 걸쳐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만들고 가꿔온 미 주류세력을 대표하는 브레인 집단이 CFR이다. 지난해 3월 하스가 발표한 ‘자유주의 세계질서, 편히 잠드소서’란 제목의 칼럼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울린 조종(弔鐘)이자 부고(訃告)다. 그는 “미국 우선주의와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양립할 수 없다”면서 트럼프 집권 이후 180도 달라진 미국의 대외정책을 직접적 사인(死因)으로 지목했다.

트럼프는 집권하자마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반(反)이민 행정명령 서명, 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이란 핵협상 파기,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 유네스코 탈퇴 등 그동안 미국이 추구해온 가치와 이상에 배치되는 정책을 잇달아 쏟아내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스스로 훼손했다. 동맹 관계에도 수혜자 부담 원칙을 적용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쓸모없는(obsolete)’ 동맹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반면 권위주의 국가의 ‘스트롱맨’들과는 잘 지내고 있다. 제도를 무시한 나르시시스트적 ‘즉흥 외교’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와 김정은의 판문점 리얼리티 쇼를 지켜본 한국 국민은 착잡하다.

트럼프 때문에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과연 타당한 해석일까.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의 대가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발행하는 전문계간지 ‘국제안보’ 최신호(2019년 봄)에서 “단지 트럼프의 정책이나 수사(修辭) 때문에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며 “자유주의 국제질서 그 자체가 붕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무모한 민주주의 확산 시도와 극단적 세계화가 불러온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망령이 ‘트럼프 현상’을 낳는 씨앗이 되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몰락은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질서 몰락은 정해진 운명

중동의 사막에 민주주의를 이식(移植)하겠다는 열망에 불탄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해 무력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권의 민족주의를 자극해 벌집을 쑤신 것 같은 부작용과 역풍을 불러왔다. 민주주의를 옮겨 심기는커녕 테러와 내전을 부추기는 결과만 낳았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난민이 유럽으로 몰리면서 유럽인들 사이에 반이민과 반난민 정서를 촉발했다.

작은 정부와 최소 규제, 감세를 내세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신(新)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은 세계를 국경 없는 무한경쟁으로 몰고 간 초(超) 세계화 현상과 맞물리면서 전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세계화의 혜택에서 소외된 서민 대중의 기득권 엘리트층에 대한 분노와 원한은 기존 정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미국에선 예상을 깨고 트럼프가 당선됐고, 영국에선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가 가결됐다. 유럽 각지에서 난민과 이민에 반대하고, 국경 폐쇄를 주장하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득세하고 있다. 민주주의 확산에 대한 과도한 열망과 경제적 이익을 향한 극단적 탐욕이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역풍을 불러와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빈대 잡다 초가삼간 태운 꼴이다.

1차 대전 이전 유럽으로 회귀할 수도

중국에 대한 무지와 오판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와해를 촉진하는 요인이 됐다. 미국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 회원으로 받아들여 자유주의 무역질서에 편입시켰다. 그렇게 하면 중국도 언젠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일원이 될 것이란 순진한 기대도 있었다.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면서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은 일취월장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도 급속히 키우고 있다. 기대와 달리 중국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보편적 가치에 역행하면서 종합국력에서 미국을 능가하는 21세기 사회주의 초강대국 실현의 꿈을 좇고 있다. 미국의 자충수에 힘입어 중국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놓고 미국과 경쟁하는 나라가 됐다.

우리의 관심은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이후의 새로운 질서에 모아진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군축이나 글로벌 경제 같은 얕은 수준에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당분간 유지되겠지만, 군사·안보 등 두터운 수준에서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두 개의 질서가 서로 대립하고 경쟁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유럽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 3국이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3국과 치열한 안보 경쟁을 벌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서로 활발히 교류한 것 같은 상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요컨대 미국이 중심이 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몰락은 트럼프 집권기의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으로, 트럼프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비슷한 처지 일본 등과 연대해야

아산정책연구원은 2017년 말 펴낸 보고서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제도와 규범이 당분간 유지되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협력보다 대결, 공동이익보다 개별이익, 대화보다 압박에 의존하는 비(非)자유주의적 경향이 나타날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다.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쇠퇴하는 가운데 중국의 도전이 본격화하면 한국의 입지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한 쪽 편을 드는 건 바보짓이다.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일본처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나라들과 연대해 실용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