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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WTO 제소가 유일한 대책인 정부의 안일함에 기업은 한숨

중앙일보

입력

일본 정부가 지난 1일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고순도 불화수소 등에 대한 통관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지난 1일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고순도 불화수소 등에 대한 통관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연합뉴스]

상대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발기술도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엎어치기도 없었다. 일본 정부가 꺼내 든 경제보복 카드에 맞설 구체적인 대응책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 1일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높인 후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대체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日 불화수소 규제 주재원 사이서 3월 소문 #경제 위축 징후는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져 #정부, 징후 반복에도 구체적인 해법 없어 #박용만 "정치가 경제 놔줘야 할 때" 비판

일본 정부는 지난 1일 반도체 핵심 소재인 투명 폴리이미드(Polyimide), 포토 리지스트(Photoresist·감광액), 고순도 불화수소(HF)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이에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와 반도체 핵심 소재 및 장비 개발에 6조원 투입을 대응 카드로 제시했다. 재계에선 “뻔해도 너무 뻔한 대책”이란 평가가 나왔다.

그동안 일본의 시그널은 명확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장관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3월 중의원 재무금융위원회에 출석해 “관세에 한정하지 않고 송금이나 비자 발급을 정지하는 등 여러 보복 조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징후도 있었다. 한·일 경제 교류 위축 징후가 처음으로 확인된 건 지난해 10월 무렵이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나온 지난해 10월 일본은 한국 주식 시장에서 순매도 행진을 벌였다. 일본과의 교역 규모도 줄어드는 중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부산에서 열려던 한-일 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는 무기한 연기됐다. 올해 5월로 잡혀있던 한-일 경제인 회의도 연말로 밀렸다. 매년 열리던 경제단체 행사가 열리지 못한 건 일본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란 뒷말이 많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초엔 국내 기업 일본 주재원 사이에서 경제보복에 대한 구체적인 소문이 돌았다. 지난 3월, 한 일본 주재원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가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불화수소 수출을 금지하거나 통관을 늦출 수도 있다는 소문이 최근 주재원 사이에서 돌고 있다”며 “구체적인 방법까지 들려 일본 정부가 본격적인 보복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고 말했다. 불화수소는 일본 정부가 보복 카드로 꺼낸 3가지 품목 중 하나다.

그럼에도 대비할 시간은 있었다. 다양한 징후가 포착된 지난해 연말부터 계산해도 한국 정부가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은 적어도 반년 이상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구체적인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한 통상 전문가는 “WTO 제소는 국가간 통상 분쟁에 있어 필수 코스지만 최근 사건 적체 현상으로 결론을 얻기까진 3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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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불안하다. 한 정밀기계 제조사 관계자는 “일본에서 절삭 기계 등 핵심 부품을 사고 있는데 공급이 언제 끊길지 몰라 불안하다”고 말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3일 페이스북을 통해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은 치밀하게 정부 부처 간 공동작업까지 해가며 선택한 작전으로 보복을 해오는 데 우리는 서로 비난하기 바쁘다. 미-중 보호무역주의로 제조업 제품의 수출이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우리는 여유도 없으면서 하나씩 터질 때마다 대책을 세운다. 이제 제발 정치가 경제를 좀 놓아주어야 할 때 아니냐.”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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