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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YG는 여자를 창으로 썼나, 방패로 내세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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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위기에 빠진 YG가 선택한 황보경 대표…불거진 ‘유리 절벽’ 논란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전 대표 프로듀서가 지난달 27일 서울지방 경찰청에서 성접대 의혹과 관련한 조사를 받은 후 귀가하고 있다. 양 전 총괄은 동생 양민석 전 대표와 동반사퇴한 후 신임 CEO로 여성인 황보경 대표를 골랐다. [뉴시스]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전 대표 프로듀서가 지난달 27일 서울지방 경찰청에서 성접대 의혹과 관련한 조사를 받은 후 귀가하고 있다. 양 전 총괄은 동생 양민석 전 대표와 동반사퇴한 후 신임 CEO로 여성인 황보경 대표를 골랐다. [뉴시스]

위기를 돌파하려는 창이냐, 국면전환용 방패막이냐.

새 CEO에 유일 여성임원 발탁 #여론전환용 ‘유리절벽’ 의구심 #기업들, 위기 닥쳐야 여성에 기회 #“과도한 피해의식” 지적도

‘양현석 제국’으로 불리던 YG엔터테인먼트(이하 YG)가 위기 극복의 흔한 공식 중 하나인 ‘여성 최고경영자(CEO) 카드’를 빼들면서 여성이 처한 ‘유리 절벽’(위기에 빠진 조직을 맡아 추락하기 쉬운 위치에 서는 것) 논란에 불을 붙였다. YG의 유일한 여성 등기임원인 황보경 전무가 신임 대표에 선임되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엔 축하한다는 반응만큼이나 ‘총알받이는 왜 여성이냐’는 자조적인 물음으로 가득하다. 가뜩이나 남초인 엔터업계 경영진 사이에서 여성 CEO의 탄생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우려 섞인 반응이 나오는 건 신임 대표의 경험이나 역량과 무관하게 그동안 기업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탓이다. 막바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서울 합정동 YG 신사옥 공사현장만큼 시끄럽고 어지러운 혼돈의 나날을 겪고 있는 YG에선 책임 있는 인물들로부터 선택의 배경을 직접 들을 수 없었다. 대신 YG가 드러낸 우리 사회의 유리 절벽을 따라가 봤다.

YG 소속 ‘빅뱅’의 승리가 연루된 버닝썬 사태로 촉발된 조직적인 성매매와 마약 관련 추문이 경찰 수사와 국세청 특별 세무조사, 국민연금 책임론에 심지어 600억 원이 넘는 LVMH계열 글로벌 투자회사의 투자금 회수 우려까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양현석 대표프로듀서(이하 양 전 총괄)는 지난달 14일 “YG의 모든 직책과 모든 업무를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회사 설립 후 줄곧 경영을 책임져온 친동생 양민석 대표(이하 양 전 대표)도 동반 퇴진했다. 양 전 대표는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주총에서 사내이사로 재선임됐으나 추문과 무관한 다른 YG 아티스트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이 나타나는 데다 또 다른 YG 소속 아이돌그룹인 ‘아이콘’ 리더 비아이의 마약 의혹을 양 전 총괄이 나서서 직접 은폐했다는 보도까지 흘러나오자 재선임 3개월 만에 전격 퇴진했다. 한마디로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아 떠밀리듯 자리를 내놓은 셈이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세간의 관심은 자연스레 추락한 YG를 구할 후임 CEO 인선에 쏠렸다. 업계에선 아내인 배우 정혜영과 함께 부부 기부천사로 유명한 ‘지누션’ 출신 션 대외협력 이사나 SK와 효성을 거쳐 지난 5월 새로 영입된 전문경영인인 가종현 부사장을 점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빗나갔다. YG는 양 전 대표 퇴진 6일 만에 “임시 이사회를 열어 황보경 신임 대표이사를 선임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황 대표는 일반엔 낯선 이름이지만 YG 안에선 존재감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평균 근속 기간 3~4년에 불과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YG에서만 18년 넘게 근무했고, 2012년과 2014년엔 각각 24억 원과 16억 원의 스톡옵션 차익을 올리기도 했다. SM과 CJ를 비롯해 전 업계를 통틀어 오너를 제외하고 그해 가장 많은 액수였다.

황 대표의 스톡옵션 대박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2000년대 중후반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막 산업으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 양 전 대표 등과 함께 투자금 마련과 재무계획을 전담하며 2011년 YG가 SM에 이어 엔터기업으로는 두 번째로 코스닥에 직상장하는 데 기여했다. 이번 주총에서 YG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된 이엔캐스트 조영봉 부사장은 한국투자파트너스 이사로 재직 중이던 2009년 YG 지분 20%에 해당하는 75억 원을 투자해 YG가 향후 시총 1조 원을 넘나드는 K팝 3대 메이저로 도약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양민석. [뉴스1]

양민석. [뉴스1]

실무작업을 했던 황 대표는 당시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투자파트너스 조 이사가 미래가치를 보고 투자한 덕분에 신인 개발 시스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빅뱅이나 2NE1 같은 스타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스포트라이트는 양 전 총괄과 양 전 대표 형제에게 주로 비췄지만 황 대표는 기여에 따른 보상을 두둑이 챙긴 셈이다.

이런 기여도나 능력에도 불구하고 황 대표 선임에 업계가 놀라는 건 그가 엔터기업의 핵심인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온 업계 유명인사나 위기관리 경험이 풍부한 전문경영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유일한 여성 사내이사이라는 점 때문이다. 대중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도 대표 선임 보도자료에 얼굴 사진조차 제공하지 않고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책임과 사명감을 느낀다. YG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기본을 바로 세우겠다”는 짤막한 입장문만 첨부한 것도 사람들의 궁금증을 부추겼다. 2015년 공개된 연봉은 다른 회사 CEO급보다 한참 낮은 1억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지난해 한동철 PD는 양 전 총괄(8억4000만 원)보다 많은 9억 원을 받았다.

션

황 대표는 국내 엔터업계의 첫 여성 CEO는 아니다. SM은 이미 2017년 보아의 일본 진출을 성공시킨 SM재팬 남소영 대표를 한세민 대표와 함께 공동대표로 선임한 예가 있다. 상장한 메이저 3사 가운데 2곳이 여성 CEO를 둔 셈이다. 이 숫자만 보면 엔터업계의 여성 존재감이 상당해 보인다. 하지만 엔터업계 종사자의 남녀 비율은 각사 모두 비슷하거나 오히려 여성이 많은 편임에도 등기임원 비중에선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큰 차이가 난다. JYP는 8명 등기임원 전원이 남성이고, SM과 JYP는 남 대표와 황 대표가 각각 유일한 여성이다. 마약과 성추문으로 얼룩진 YG가 회사를 이끌 적임자를 세웠다기보다 국면전환용으로 여성을 내세워 잠깐 방패막이로 쓰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터져 나오는 데는 이런 업계의 분위기도 한몫한다.

가종현

가종현

사실 이런 선택은 영국과 미국에선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최근 미국 워너브라더스가 창사 10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CEO 앤 사노프를 선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임자 케빈 츠지하라가 성접대 추문으로 물러나자 여성 카드를 뽑아 들었다. 앞서 지난해 5월 비슷한 성추문을 겪은 폭스뉴스 역시 여성 CEO 수잔 스콧을 선택했다. 평판 추락이 경영상 위기로 이어지자 여성 카드로 반전을 꾀한 셈이다.

연구 결과도 있다. 엑서터대학교 사회심리학자 미셸 라이언과 알렉스 하슬람이 2005년 런던증권거래소 상위 100대 기업 최고위직을 조사한 결과 조직이 잘 굴러갈 때가 아니라 결정적 위기에 처했을 때만 여성을 이사회에 위촉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를 쓴 인지 심리학자 터리스 휴스턴은 미 자동차업계 첫 여성 CEO가 된 GM의 메리 배라도 같은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임명 직후 자동차 수백만 대를 리콜하기 시작하며 회사가 위기에 처했는데 알고 보니 이 회사 이사진은 이미 치명적 결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황보경

황보경

록펠러재단의 연구용역 조사 결과도 여성의 유리 절벽이 흔한 현상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여성 CEO의 42%가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임명됐지만 비슷한 경험의 남성 비율은 절반 수준인 22%에 불과했다. 또 2004년 이후 포춘 500대 기업 중 경영난으로 해고된 여성 CEO가 다른 기업 CEO로 간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위기에 빠진 다음에야 여성이 조직을 맡았지만 결국 실패에 대한 책임을 과도하게 지고 다음 경력을 쌓을 기회를 찾지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1998년 주요 언론사(한국일보) 첫 여성 사장을 지낸 장명수 이화학당 이사장은 “회사가 위기에 빠졌는데 단순히 시험용으로 여성 리더를 세우는 조직은 없다”며 “어려운 때일수록 돌파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기 마련이고 이럴 때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여성을 선택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는 “나 역시 남자 후배 3~4명이 국장할 동안 부국장 같은 자리에서 몇 년을 견뎌야 했던 것은 물론 여자 국장은 시기상조라는 얘기를 들었다”면서도 “과도한 피해의식은 여성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