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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기본' 메뉴 사라지는 전주, 주당들은 어떡하라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36)

전주막걸리 주점의 특징은 막걸리를 담는 커다란 주전자와 푸짐한 안주다. 주전자에는 3병의 막걸리가 담겨 나온다. [중앙포토]

전주막걸리 주점의 특징은 막걸리를 담는 커다란 주전자와 푸짐한 안주다. 주전자에는 3병의 막걸리가 담겨 나온다. [중앙포토]

지난주에는 전주에 이사 온 후 일상적으로 접하는 바깥 음식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일상에 여유와 흥취를 가져다주는 술 이야기다. 전주의 술 문화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막걸리다. 원래 막걸리 한 주전자(세 통 들어간다)를 주문하면 푸짐한 안주상이 차려진다. 한 주전자씩 추가할 때마다 새 안주가 나오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방식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전주 친구들의 자랑에서부터, 멀게는 전주에서 대학 다니신 선친께서 “원래 막걸리를 마시면 안주는 알아서 챙겨주었다”고 기억하시던 걸 보면 꽤 오래된 전통 같다. 오래전에 부모님과 전주 여행을 했었다. 가장 유명한 한정식집으로 모셨다.

들여온 교자상을 보니 푸짐할 거라는 기대와 달랐다. 수십 가지 음식들이 아주 예쁘고 정갈하게, 그러나 너무 약삭빠르게 조금씩 담겨 있었다. 가족식사보다는 페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좋을 듯했다. 가끔 전통과 품격을 고수하는 곳에서 겪는 일이다.

예전에는 막걸리를 주전자 단위로 주문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 수에 맞춘 세트를 구성한 가게가 많아졌다. 술보다는 다양한 요리를 맛보고 싶어하는 고객 취향에 따른 것이라 한다. [사진 박헌정]

예전에는 막걸리를 주전자 단위로 주문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 수에 맞춘 세트를 구성한 가게가 많아졌다. 술보다는 다양한 요리를 맛보고 싶어하는 고객 취향에 따른 것이라 한다. [사진 박헌정]

부모님이 좋아하신 것은 저녁에 찾아간 삼천동의 막걸릿집이었다. 막걸리 한 주전자(1만 5000원)를 주문하니 생선구이, 전, 계란찜, 삼합 같은 안주가 나왔다.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도전할 수 없는 내장탕도 올라왔다. 처음에는 신기함, 그리고 점점 맛에 빠져 드셨다. 한 주전자 더 주문했을 때 따뜻한 안주가 두어가지 더 올라오면서 즐거움은 절정에 달했다. 역시 배부르게 잘 먹고 싶으면 외국산 재료도 적당히 쓰고 ‘퓨전’도 도입한 대중적인 곳에 가야 한다.

이후 막걸릿집은 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가 되었다. 그런데 물가상승 압력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가격이 살살 오르더니 급기야 요즘은 물가 차원을 넘어 완전히 변했다. 유명한 가게들은 정과 여유가 빠지고 요리가 더 추가되어 ‘관광상품’으로 세팅된 느낌이다.

‘기본’ 한 주전자는 2만원 이상이 되었고, 그나마도 메뉴에서 빠지거나 구석에 조그맣게 쓰여있다. 대신 커플상(3만 5000~3만 8000원), 가족상 또는 잔치상(5만~8만원) 같은 게 생겼다. 요즘은 술을 많이 안 마시니 한 주전자만 시켜도 두 주전자 이후에 나오는 모든 안주를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결국 네 명이 2만 원짜리 막걸리 한 통 먹고 나가는 것을 막고 인당 1만 5000~2만원의 객단가를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느껴진다.

가격 때문에 서운한 게 아니다. 산적 같은 친구놈과 커플상을 주문해 입맛 떨어진 것도 아니다. 모든 게 양적 경쟁으로 바뀌었다. 블로그 광고나 중소 인터넷매체들의 노골적인 홍보기사가 언급한 곳에 찾아가 보면 한정식만큼 많은 음식을 차려내니 정작 막걸리의 존재감이 사라져간다.

예전 방식대로 ‘기본’ 한 주전자를 주문해서 나온 안주들(위). 한눈에 보기에도 단촐하지만 술맛은 더 살아났다. 새 방식에 따라 주문했던 커플상(아래). 저 음식들 이후에도 중량감 있는 요리가 몇 개나 더 나와서 상을 정리해가며 먹어야 했다. [사진 박헌정]

예전 방식대로 ‘기본’ 한 주전자를 주문해서 나온 안주들(위). 한눈에 보기에도 단촐하지만 술맛은 더 살아났다. 새 방식에 따라 주문했던 커플상(아래). 저 음식들 이후에도 중량감 있는 요리가 몇 개나 더 나와서 상을 정리해가며 먹어야 했다. [사진 박헌정]

전주에서는 막걸리를 밤새 가라앉혀 윗부분의 맑은 술만 떠서 마시는 경우가 많다. 맛이 깔끔하고 많이 마셔도 머리 아프지 않다. 탁주에서 빼낸 청주 같은 술, 그 술맛을 느껴가며, 이야기하며, 상에 놓인 메추리알도 까먹어 가며 마시던 막걸리였는데 이제 술맛 느낄 틈이 없다.

요리에 치여 구석으로 떠밀려버린 주전자. 막걸리는 음료수로 강등되었다. 그럼 결국 술집이 아니라 패밀리레스토랑 아닌가. 음식만 보면 마치 뷔페 같다. 소비자 취향은 저격했는지 모르겠지만, 전주막걸리의 전통과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엊그제 ‘기본’을 주문해보았다. 눈치 주지 않고 접시도 여러 개 놓였지만 예전에 비해 초라했다. 그런데 안주가 가벼워지니 오히려 술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막걸리는 농민과 노동자의 술이다. 땀 흘린 후 마시면 그렇게 달고 시원하고 든든한데 온종일 노닥거리고 놀다 마시면 속이 꾸륵거리고 더부룩하다. 등산 후 노란 양은대접에 가득 담아 쭉 들이켜고 총각김치 씹을 때의 그 맛을 어떻게 잊을까.

음식 종류가 늘수록 막걸리는 구석으로 밀려난다. 여유롭게 술맛을 느끼던 주당들에게는 낯설고 아쉬운 일이다. 옛날 정취 같지 않은 건 전주막걸리뿐만이 아니다. 대성리, 남이섬, 피맛골 등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재개발 전, 문전성시를 이루던 피맛골의 2001년 모습. 500년 역사의 이 길엔 서민을 위한 음식점이 즐비했다. [중앙포토]

음식 종류가 늘수록 막걸리는 구석으로 밀려난다. 여유롭게 술맛을 느끼던 주당들에게는 낯설고 아쉬운 일이다. 옛날 정취 같지 않은 건 전주막걸리뿐만이 아니다. 대성리, 남이섬, 피맛골 등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재개발 전, 문전성시를 이루던 피맛골의 2001년 모습. 500년 역사의 이 길엔 서민을 위한 음식점이 즐비했다. [중앙포토]

유명한 가게들은 거의 새 방식으로 영업하니 옛날이 그리운 나 같은 주당들은 동네의 작은 식당을 잘 뒤져야 한다. 그런 곳은 한 상 차려내지 못하고 닭볶음탕, 삼합, 낙지 볶음 같은 단품과 밑반찬이 나온다. 그것도 아주 괜찮다. 옛 추억을 말하다 보면 "거기도 이제 끝났어. 옛날 같지 않아" 하는 말이 자주 나온다. 끝난 곳이 한둘인가. 대성리, 남이섬, 해운대, 대학가, 종로 피맛골... 젊음의 낭만과 추억을 간직한 그런 곳들은 끝없이 바뀐다.

옛날의 그 정취가 사라지니 야속하다. '변질'이라 표현한다. 그런데 거기가 정말 끝난 것일까? 생명 있는 것은 변하는 게 당연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죽고 사라져 내 머릿속에 추억의 박제로 남은 것들뿐이다. 그러니 끝나가는 건 대성리나 강촌이 아니라 나다. 같은 속도로 바뀌기 싫어 대상을 추억의 방향으로 끌어당기려고 해봐야 옛날의 ‘그것’들은 희미한 기억과 술자리 넋두리 속에서나 떠돈다.

그 맛있던 삼겹살, 짜장면이 왜 이렇게 맛이 없어졌지? 프로야구도 이제 싱겁고 집중이 안 돼. 그것들이 점점 퇴보하고 변질하고 끝나가는 것일까? 자꾸 내 기준으로 투덜대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떼쓰면 세상이 나를 피곤해한다. 그런 미움 받지 않도록 하늘은 유한한 생명을 주신 걸지도 모른다. 전주에 내려온 이후 바뀌고 있는 막걸리 문화에 당황한다면, 역시 나날이 달라지는 가맥문화에는 점점 빨려드는 느낌이다. 다음에는 가맥 이야기를 해볼까?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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