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지시받고 점수 조작’ 인사팀장은 공범인가, 피해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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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주 월요일(6월 24일) 서울중앙지법 523호 법정. ‘강원랜드 채용 비리’ 사건의 피고인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인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이순형)는 “권 의원이 강원랜드 측에 채용 청탁을 했다는 사실을 검사가 입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같은 시각 같은 법원 412호 법정에서는 같은 혐의(업무방해·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기소된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이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권희) 심리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강원랜드 청탁 비리’ 재판 #“공범이면 청탁자는 업무방해 무죄” #염동열 재판 증인으로 나온 최흥집 #“나도, 청탁자도 점수 조작 몰랐다” #일상적 부패에 법의 판단은 뭘까

지난달 2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 재판에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염 의원은 채용 청탁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권성동 의원은 같은 날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 재판에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염 의원은 채용 청탁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권성동 의원은 같은 날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이날 오전 10시 시작된 염 의원 재판엔 중요 증인이 출석했다.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이었다. 재판장인 권희 부장판사가 말했다.

“증인, 본인 재판에 불리한 부분은 진술을 거부해도 됩니다.”

채용 비리를 지시한 혐의(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등)로 기소된 최 전 사장은 지난 1월 춘천지법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2~2013년 강원랜드 교육생 채용 과정에서 현역 국회의원과 지역 유지 등 유력 인사들로부터 청탁을 받고 서류전형 합격 등을 직원들에게 지시한 혐의였다. 1차 교육생 최종합격자(320명)의 89%, 2차 교육생 최종합격자(198명) 전원이 청탁 대상자였다.

지난달 2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 재판에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이증인으로 출석했다. 염 의원은 채용 청탁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권성동 의원은 같은 날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 재판에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이증인으로 출석했다. 염 의원은 채용 청탁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권성동 의원은 같은 날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최 전 사장이 증인 선서를 한 뒤 증인석에 앉았다. 염동열 의원은 변호인들과 나란히 앉아 증언 모습을 지켜봤다. 검사가 먼저 신문했다.

1차 채용 전에 커피숍에서 피고인(염 의원)을 만난 적 있죠? 당시 증인에게 폐광지역 사람들 많이 채용해달라고 했죠?
“예.”
폐광지역 사람들 많이 채용해 달라는 얘기는 피고인 지역구(태백·횡성·영월·평창·정선) 사람들을 많이 채용해달라는 것과 같은 말이죠?
“예.”
강원랜드 대표 입장에서 국회의원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습니까?
“거부하기 좀 곤란합니다.”

검사는 “직무능력평가(인·적성 검사) 결과 청탁대상자 다수가 탈락하게 되자 증인이 면접 참고 자료로만 활용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최 전 사장은 시인한 뒤 “당초 계획된 대로 하는 게 맞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했다.

최대 쟁점은 2차 채용 면접이 끝난 다음 날인 2013년 4월 13일이었다. 검사는 ‘광고 후원 협약식’ 사진 기사를 제시했다. 사진 속 플래카드엔 ‘2013년 4월 13일(토) 컨벤션 호텔 함백룸’이라고 적혀 있었다.

강원랜드 채용 비리 당시 점수조작 증거 서류. 이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해 본지에 제공한 것이다. [중앙포토]

강원랜드 채용 비리 당시 점수조작 증거 서류. 이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해 본지에 제공한 것이다. [중앙포토]

토요일인 그날 피고인을 만났죠?
“만나기는 했는데 언제, 어디에선지는 확실한 기억이 없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이 사진을 보고 시기를 기억하기 쉬웠던 것 같은데, 그날 컨벤션 호텔에서 행사를 가진 뒤 호텔 로비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명단을 받았다고 진술했죠?
“예. (검사가 ‘컨벤션 호텔로 기억나죠?’라고 확인하자) 명단은 받았는데 장소와 시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검사는 인사팀장 권모씨 얘기를 꺼냈다.

같은 날 오후 인사팀장 권○○을 관사로 불러서 명단을 주면서 ‘지금 난리가 났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 합격시키라’고 말했다는 데 맞습니까?
“기억은 안 납니다만, 권 팀장이 그렇게 진술한 것은 봤습니다.”
인사팀장이 거짓말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제가 명단을 주기는 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인들도 문제의 ‘2013년 4월 13일’을 파고들었다.

광고 후원 협약식 사진을 봐도 4월 13일 만나서 명단을 주고받은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지요?
“날짜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변호인은 이어 채용 청탁 과정을 물었다. 청탁에 강압성이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것이었다.

추천자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합격시켜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죠?
“예.”
반드시 합격시켜줘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성적 조작으로 합격시켜야 한다고 느꼈습니까?
“아닙니다.”

최 전 사장은 “잘못된 방법이 동원됐다는 걸 검찰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됐다”고 했다.

인사팀장이 “이런 건 안 됩니다. 거절합니다”고 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인사팀장이 “나는 싫은데 사장님이 시켜서 억지로 합니다”라고 한 적 있나요?
“없습니다.”

다시 검사가 마이크를 켰다.

직접 국회의원으로부터 명단을 받은 경우가 피고인 외에 또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준에 따라 진행하면 되는데 명단을 주면서 신경을 쓰라고 한 것 자체가 직원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보면 부당한 지시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폐광지역 지원자에 대해선 서류 전형 때 우대 점수로 ‘플러스 5점’ 주는 것 말고는 성적대로 평가하는 것이 원칙이죠?
“예.”

변호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전형 단계별로 점수 조작을 한다는 걸 증인도 몰랐죠?
“예.”
외부 추천자도 몰랐겠죠?
“밖에서는 몰랐을 겁니다.”

재판이 끝났을 때 법정의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법정에서 나오는 염 의원에게 물었다.

최 전 사장에게 명단을 준 적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2013년 4월 13일 말고 다른 날도 마찬가지인가요?
“예. 명단을 준 사실이 없습니다.”
지난달 2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 재판에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염 의원은 채용 청탁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권성동 의원은 같은 날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뉴스1]

지난달 2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 재판에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염 의원은 채용 청탁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권성동 의원은 같은 날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뉴스1]

권성동 의원 재판부는 1, 2차 교육생 선발 청탁 혐의에 대해 “피고인이 전인혁(전 강원랜드 본부장)에게 명단 전달을 요청했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또 “설령 청탁한 사실이 있다고 해도 업무방해 혐의를 인정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인사팀장이 ‘최흥집의 부당한 지시를 적극적으로 추종하고, 부정한 선발행위를 주도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받은 청탁까지 반영시키는 등으로 최흥집의 부정행위에 가담한 공범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즉, 인사팀장을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의 상대방, 피해자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워낙 너나없이 청탁을 주고받은 상황에서 방해할 정상적 업무 자체가 없었던 셈”이라고 했다. 이 판단은 지난해 11월 춘천지법 강릉지원이 권모 전 강원랜드 감사위원장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면서 인사팀장을 ‘업무방해의 피해자’로 본 것과 상반된다.

이러한 관점 차이는 강원랜드 청탁 비리의 특수성에서 나온다. 지역 유력 인사들과 강원랜드 사장·간부들이 장기간 죄의식까지 잃은 채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었다. 사장은 “우수한 사람 있으면 추천하라”며 인심 쓰고 다녔다. 서류전형, 인·적성 검사 등 단계마다 청탁대상자들이 탈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고받고는 “서류전형은 통과시켜줘라” “검사 결과는 면접 참고자료로 쓰라”고 말했다.

사장은 쉽게 얘기하면 되지만, 인사팀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심사위원들에게 “(명단 대상자들의) 자기소개서 평가 점수를 높이라”고 하거나 직접 심사위원 아이디·비밀번호로 평가시스템에 접속해 점수를 조작해야 했다. 탈락했어야 할 지원자들을 면접장에 들여보냈다. 그 결과, 열심히 노력해 기준을 통과한 지원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피해를 봤다. 아무리 범죄의식이 없었다고 해도 피해자(채용 탈락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범죄로 볼 수 밖에 없는 행태다.

사장도, 청탁자도 그런 조작 과정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일까. 청탁자가 청탁하지 않고 사장이 지시하지 않았다면 점수 조작이 일어났을까. 인사팀장 자신이 청탁받은 이들도 끼워 넣었다는 이유로 업무방해의 피해자가 아니라고 봐야 할까. 공범이자 피해자 아닐까. 청탁받은 자들은 유죄이고, 청탁한 자들은 무죄라는 결론이 옳은 걸까.

숱한 물음들 반대쪽에는 형사재판의 원칙이 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유·무죄는 증거와 진술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실제 청탁이 있었는지 엄격하게 봐야 하고, 그 청탁을 과연 형법의 잣대로 처벌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이뤄져 온 부패에 대해 법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형사사법은 늘 딜레마 위에 있다. 분명한 건 판결이 시민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