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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고속열차 부족한데 왜 더 못 사나?.."열차 살 때도 예타 거쳐야" 논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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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나 성수기 때는 KTX 좌석을 구하기 어려워 증편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스1]

주말이나 성수기 때는 KTX 좌석을 구하기 어려워 증편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스1]

 지난 2016년 말 코레일 경영진에서는 향후 고속철도 수요 증가에 대비해 차세대 동력분산식 고속열차인 'EMU-300' 열차 24편성을 구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8량(칸) 1편성으로 모두 192량에 구매 가격만 6000억원에 육박하는 과감한 계획이었는데요.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고속열차에다 추가로 구매한 차량까지 더해서 운영하면 주말과 성수기 때 좌석난을 상당 부분 덜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기획재정부가 그해에 만든 '공공기관 예비타당성조사' 규정 때문인데요.

 2016년 공공기관 예타제도 도입  

  2016년 3월 개정된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과 그해 9월에 개정된 시행령에 따르면 기재부가 지정한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은 신규 투자사업을 할 때 총액 1000억원 이상에 정부와 공공기관 투자분이 500억원을 넘는 경우 반드시 공공기관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코레일은 기재부가 지정한 준시장형 공기업이어서 이 규정의 적용을 받게 된 건데요. 그해 공공기관 예타에서 코레일의 EMU-300 구매 건은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구매량이 너무 많다"는 이유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코레일이 2016년에 발주한 차량은 준고속형인 EMU-250 19편성과 고속열차인 EMU-320 2편성뿐이었습니다.

KTX를 운영하는 코레일은 준시장형 공기업이라 열차 구매 때 예타를 거쳐야 한다. [중앙포토]

KTX를 운영하는 코레일은 준시장형 공기업이라 열차 구매 때 예타를 거쳐야 한다. [중앙포토]

 이들 열차는 증차가 아니라 기존 노후 차량을 대체하거나 새로 건설되는 노선에 투입해야 하는 차량이어서 기재부와의 협의 끝에 예타가 면제돼 발주가 가능했던 겁니다.

 코레일, 대규모 열차 증편 예타 탈락 

 그 뒤 3년이 지난 현재 요즘에서야 코레일은 다시 EMU-300 차량 8편성을 추가로 사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하는데요. 구매량이 이렇게 줄어든 것은 아마도 공공기관 예타를 의식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SRT도 열차가 부족한 탓에 주말이면 심각한 좌석난이 빚어진다. [중앙포토]

SRT도 열차가 부족한 탓에 주말이면 심각한 좌석난이 빚어진다. [중앙포토]

 수서고속철도(SRT)를 운영하는 SR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2016년 개통 이후 승객이 계속 늘어 주말에는 거의 표를 구하기가 힘들 정도인데요. 이런 상황이라면 서둘러 차량을 추가로 구매하는 게 맞을 겁니다.

 열차를 더 구입해 열차와 열차를 연결하는 '중련 편성'을 해서 운행하면 수송력을 훨씬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량은 자체 구입한 10편성(100량)과 코레일에서 빌려준 22편성(220량)에서 더 늘지 않았습니다.

SR의 좌석 예매앱. 주말이면 거의 모든 좌석이 매진이다. [앱 화면 캡처]

SR의 좌석 예매앱. 주말이면 거의 모든 좌석이 매진이다. [앱 화면 캡처]

 SR이 정비를 위탁한 코레일의 수용 능력을 고려한 측면도 있지만, 공공기관예타를 의식한 부분도 적지 않다고 하는데요. SR은 지난해까지는 예타대상이 아닌 기타공공기관이었지만, 올해 초 준시장형 공기업으로 지정됐기 때문에 예타를 받아야만 합니다.

 좌석난 SR, 예타 신청하고 대기 중 

 SR은 지난 5월에 EMU-320 14편성(112량)을 추가로 도입하기 위해 기재부에 예타를 신청해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예타을 통과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상당기간 수서고속철의 좌석난은 풀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SR 내부에서는 "예타대상이 되기 전에 서둘러 열차를 발주했어야 했는데 아쉽다"는 말도 나온다고 합니다.

SR은 열차 2편성을 하나로 연결해 좌석을 늘리는 '중련 편성'을 일부 운영 중이다. [블로그 기차만 바라보는 소년 캡처]

SR은 열차 2편성을 하나로 연결해 좌석을 늘리는 '중련 편성'을 일부 운영 중이다. [블로그 기차만 바라보는 소년 캡처]

 실제로 서울 지하철 대부분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는 지방공기업이기 때문에 공공기관 예타 대상이 아니어서 열차 증편이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기재부가 공공기관 예타를 도입한 취지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당시 기재부는 "공공기관 예타가 국민 세금, 독점적 수입 등으로 운영하는 공공기관의 타당성 없는 사업 추진을 방지해 사업 효율성을 높이고 재무건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검증 장치"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공공기관의 방만하고 부문별한 투자는 분명히 막아야 하고, 검증 장치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공기업 등 공공기관의 자율성과 경쟁력 향상도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인데요.

 "열차 구매, 빠른 의사결정이 관건" 

 특히 코레일이나 SR 같은 철도운영기관은 언제, 어떤 규모로 열차를 더 사들여 실전에 투입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입니다. 그리고 결정이 내려졌다면 신속하게 열차를 발주하는 게 필요한데요.

열차 제작사인 로템에 따르면 고속열차는 설계에서 납품까지 거의 4년 가까운 시간이 걸립니다. 그만큼 빠른 의사결정과 집행이 중요합니다.

고속열차를 발주해도 설계에서 납품까지 4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다. [중앙포토]

고속열차를 발주해도 설계에서 납품까지 4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다. [중앙포토]

 그런데 증편을 위한 열차 구매를 놓고 일일이 기재부와 협의하거나, 예타를 받아야만 한다면 시간은 더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열차 도입이 지체되면 될수록 그 불편은 결국 승객, 즉 국민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공기업도 중요의사 결정 사안을 매번 기재부에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자체 판단력과 경쟁력 역시 상당히 약화될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코레일 고위 간부는 "열차 구매는 운영기관에서 필요에 따라 책임지고 집행하도록 자율권을 주고, 추후 경영 평가 등을 통해 문제가 있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물으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공기업 자율권 주고,책임 따지면 돼" 

 전문가들도 의견은 비슷합니다. 최진석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열차 구매 시점과 물량 등을 결정하는 능력이 철도운영기관에 요구되는 가장 큰 경쟁력"이라며 "현재는 운영기관 대신 기재부가 이를 판단해주는 구조라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유정훈 아주대 교수도 "공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자율권을 주고, 대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으면 될 것"이라며 "지금 관련 규정은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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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지는 좋더라도 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오히려 부정적이라면 분명히 다시 손을 봐야 합니다. 전문가들 조언대로 자율권을 부여하되 검증과 책임 규명을 명확히 하는 방향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결과적으로 국민에게도 보탬이 되리라 판단됩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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