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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직 장악한 일본의 ‘적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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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도쿄총국장

서승욱 도쿄총국장

전임 이수훈 전 주일대사 시절 정부 소식통이 들려준 얘기다. “이 대사도 마음 고생이 많다. 위안부 합의 재검토 때 정권 핵심엔 합의 파기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이 대사는 ‘파기는 안된다, 대일외교가 너무 힘들다’고 버텼다. 그랬다가 정권 핵심으로부터 ‘일본 사람 다 되셨네~’란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합의가 그나마 파기되지 않은 데엔 이 대사의 공도 있다.” 일본 전문가가 아닌 이 대사를 파견한 뒤 그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정권의 실력자가 ‘왜 시킨대로 하지 않고 반기를 드느냐’는 취지로 압박했다는 내용이다.

정권 핵심이 주도하는 외교의 단면이다.

글로벌 아이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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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위안부 합의뿐 아니라 징용문제도, 대일외교뿐 아니라 미국 외교도 마찬가지다. 우리 외교 당국의 대응을 보면 현장 상황을 잘 반영하지 못하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윗선에서 답을 정해놓고 상황을 거기에 끼워맞추려 하니 외교부가 ‘사고처리반’수준으로 전락했다”거나 “적폐 청산이 강조되면서 과거 정부에서 잘 나갔던 이들이 물을 먹고, 예상치 못한 인사의 요직 발탁이 이어지며 외교 역량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큰 틀에서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분위기 탓에 현장의 외교관들 중엔 정권 핵심부의 논리를 대변하는 데만 열중하는 이들도 일부 있다. 그래서 상대국 정부에서 “외교를 하자는 건지, 싸움을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종종 터져나오기도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북핵외교기획단장과 주미공사 등을 지낸 조현동 전 공사가 현 정부 출범 뒤 2년여동안 보직을 받지 못하다 은퇴했다는 뉴스가 최근 있었다. 조 전 공사외에도 숱하게 많은 미국통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퇴직하거나 보직 대기중이라고 한다. 이렇듯 외교부내엔 보수 정권 청와대에서 일했거나 중요한 일을 담당했다는 이유로 인사 때마다 불이익을 걱정해야하는 관료들이 꽤 있다. 일은 잘 했으나 불이익을 받는 풍토가 정상일 리는 없다.

일본 외무성에서 ‘요직중의 요직’을 수행 중인 가나스기 겐지(金杉憲治)아시아대양주 국장은 민주당 정권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내각’때 총리비서관으로 노다 총리를 보좌했다. 하지만 요즘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는 한·일, 중·일, 북·일간 문제로 하루가 멀다하고 그를 찾는다. 우리의 국정원장에 해당하는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내각정보관도 노다 정권에서 현직에 발탁됐지만 아베 총리는 그를 7년동안 계속 중용하고 있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 삼간을 계속 태우다간 우리 외교의 토대가 다 타버릴 수 있다.

서승욱 도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