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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총·식칼·손도끼에 맞서라…요즘 공무원 호신술 배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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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달 28일 오전 9시40분쯤 대구 남구청장실. 조재구 남구청장과 면담하던 A씨(61)가 갑자기 “같이 죽자”며 생수병에 담아 온 휘발유를 바닥에 뿌리고 라이터를 들었다. 깜짝 놀란 조 구청장이 테이블을 건너뛰어 A씨에게서 라이터를 빼앗으면서 불이 나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A씨는 조 구청장을 뿌리치고 도망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도주하던 A씨를 검거, 현주건조물 방화 예비 혐의로 입건했다. A씨는 “구청 공무원 때문에 여동생이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치료비를 요구하다 거부당해 구청장실로 찾아갔으나 도와주지 않아 같이 죽으려 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조 구청장은 “A씨의 민원은 사실과 달랐다”며 “민원인이 공무원을 상대로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장 직원들은 얼마나 두렵겠느냐”고 말했다.

폭행·폭언은 예삿일 성희롱까지 #공무원 “사회복지 부서 가장 심해” #“힘 쓰면 들어준다는 인식 커져 #공권력 침해 처벌 강화해야”

지자체장, 표 의식 적극 대처 못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민원인의 공무원 위협이 위험 수준이다. 폭언·폭행은 물론 성희롱·성추행까지 현장에서 당하는 피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일부 과격한 민원인 때문에 공무원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8월 경북 봉화군 소천면사무소에서 민원 처리에 불만을 품은 B씨(78)가 엽총을 쏴 공무원 2명이 숨졌다. B씨는 “물 부족 문제로 이웃과 다퉜는데 (공무원이) 도와주지 않았다”고 범행 동기를 밝혔다. 수사 과정에서 B씨가 여러 차례 사격연습을 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이뤄진 항소심에서 B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8월 경북 봉화군 소천면사무소에서 발생한 엽총 난사 사고로 공무원 2명이 숨지고 주민 1명이 부상을 당했다. 면사무소 유리창에 탄흔이 선명하다. [뉴스1]

지난해 8월 경북 봉화군 소천면사무소에서 발생한 엽총 난사 사고로 공무원 2명이 숨지고 주민 1명이 부상을 당했다. 면사무소 유리창에 탄흔이 선명하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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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난 소천면사무소는 지난해 연말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민원인이 다니는 정문을 제외한 양쪽 출입문에는 도어록(자동잠금장치)을 만들고 고화질 폐쇄회로TV(CCTV)를 추가로 설치하는 등 보안시스템을 강화했다. 부서마다 비상벨도 설치, 지난해와 같은 사건이 나면 경찰이 곧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대책도 마련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공무원에 대한 폭행 건수는 2017년 92건에서 지난해 1~8월에는 143건으로 증가했다. 2017년 월평균 7.7건이던 게 지난해엔 17.9건으로 급증했다. 폭행은 경기(22건→43건)와 충남(0건→8건)에서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민원인에 대한 고소·고발도 2017년 56건에서 2018년엔 8월까지 73건이나 이뤄졌다. 행안부에 따르면 중앙부처와 자치단체에서 발생하는 폭언·폭행·반복민원 등 특이민원이 2016년 3만4566건을 비롯해 한 해 평균 3만5000여 건에 달한다.

2014년 8월 보상에 불만을 품은 민원인이 차량을 몰고 아산시청 현관으로 돌진한 모습. [중앙포토]

2014년 8월 보상에 불만을 품은 민원인이 차량을 몰고 아산시청 현관으로 돌진한 모습. [중앙포토]

공무원 상대 폭언·폭행은 중앙부처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주 발생한다. 청사 출입이 엄격한 중앙부처와 달리 지방자치단체는 민원인이 청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서다. 2017년 6월 22일 충남 아산시청에서는 민원인 C씨(55)가 사무실로 난입해 “왜 나만 단속하냐, 신고한 사람을 알려 달라”고 소리치며 20분간 손도끼로 공무원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무원 상대 소송도 한해 3만여 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행안부는 지난해 5월 폭행·폭언 등으로부터 민원 담당 공무원을 보호하겠다며 개정된 ‘공직자 민원 대응 지침’을 전국 모든 행정기관에 배포했다. 민원이 발생하면 서면 공고문 발송과 함께 법적 대응에 나설 것도 주문했다. 특이민원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큰 데다 공무원의 정신적·육체적 피해가 확산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행안부의 지침 효과에 의구심을 제기한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치단체장이 주민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공무원노조가 “주민 눈치를 보는 자치단체장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다”며 직접 대응에 나선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서울의 한 구청에서 일하는 공무원(9급)은 “민원인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기가 겁이 날 정도”라며 “욕설은 예삿일이고 서류를 찢어서 얼굴에 던지는 경우도 있다. 사회복지 관련 부서에서 특히 심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의 한 구청에서는 긴급 생계지원금을 받고도 계속 지원을 요구하는 민원인 때문에 공무원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경기도에 살던 민원인은 서울의 특정 구에서 더 많이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당 지역의 고시원으로 주소를 옮겼다고 한다. 그는 지원금을 더 달라고 구청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담당 부서에 수시로 전화를 걸어 사실상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

공무원을 상대로 한 민원인의 고소·고발도 연간 수만 건에 달한다. 자신이 제기한 민원이 해결되지 않자 고소·고발을 남발해서다. 하루에 수십 번씩 전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법을 무기로 공무원을 괴롭히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지난해 공무원이 피의자인 범죄 접수 건수는 3만6782건, 이 가운데 소송의 대상이 되지 않거나 요건을 갖추지 못해 각하한 것만 44%(1만6281건)에 달한다. 범죄 혐의점이 없는데도 ‘일단 걸고 보자’는 묻지 마 소송이 늘어난 탓이다.

권영주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는 “힘을 쓰면 상대편이 들어준다는 인식 때문에 악성민원이 계속 생기고 공권력도 추락하고 있다”며 “공권력 침해 사건에 대해서는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진호·이상재·최모란·백경서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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