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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스포일러라서? 작품성에도 시청률 저조한 '녹두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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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꽃'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욕망과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SBS]

'녹두꽃'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욕망과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SBS]

"보시오, 새 세상이오."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려 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결연한 외침이 안방극장에선 큰 울림으로 메아리치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소재의 SBS 대하사극 '녹두꽃' 얘기다. 이 드라마는 방영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었지만 그간 서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동학혁명이 모처럼 대중문화 콘텐트의 중심에 섰기 때문. 동학군의 황토현 전투 승전일(5월 11일)이 올해 초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지정된 것도 과거 '동학난'으로 평가절하됐던 동학혁명의 재조명 분위기에 한몫을 했다.
4월 말 시작해 현재 후반부로 치닫고 있는 드라마의 만듦새는 호평을 받고 있다. 격동의 구한말, 폭정에 신음하던 민초들이 들고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결연한 의지가 화면 가득 느껴진다.

동학농민혁명 다룬 SBS 드라마 #"비극적인 결말이 부담스러워서 #시청자 외면하는 듯" 전문가 분석 #전봉준보다 민초들 전면에 내세워 #"의도는 알지만 너무 앞서간 전략"

100억대 제작비, 스펙터클한 전투 

100억원대 제작비를 들인 드라마답게 동학군의 봉기장면과 전투신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지고, 고증 또한 사실적이다. KBS 사극 '정도전'을 썼던 정현민 작가의 필력은 물론, 조정석·윤시윤·한예리·최무성 등 주요출연진의 연기도 빼어나다.
그럼에도 시청자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다. 시청률은 황토현 전투가 사실적으로 그려진 6회(5월 11일 방영)때 9.1%(닐슨코리아)로 정점을 찍은 뒤 종방을 3주 앞둔 현재 4~6%대에 머문다. TV화제성 부문(굿데이터코퍼레이션)에서도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녹두꽃'의 성적표는 왜 이리 초라한 걸까.

'녹두꽃'에는 구한말 긴박한 국내외 정세와 일제의 치밀한 조선침탈 전략 등이 자세히 묘사된다. [SBS]

'녹두꽃'에는 구한말 긴박한 국내외 정세와 일제의 치밀한 조선침탈 전략 등이 자세히 묘사된다. [SBS]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의 최대 스포일러인 실제 역사가 시청률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미와 재미가 충분한 드라마이지만, 실패한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만들어내는 우울한 정조가 시청장벽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하루하루가 힘겨운 대중에게 고구마처럼 퍽퍽하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패배의 결말을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24부작의 너무나 긴 호흡으로 펼쳐놓다 보니 지루함을 느낀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전봉준 아닌 민초들 내세운 건 패착?

혁명의 리더 전봉준이 아닌, 평범한 민초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략이 패착이라는 지적도 있다.
윤석진 드라마평론가(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동학혁명이 지닌 민중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민초들을 전면에 내세운 의도는 이해하지만, 영웅 서사가 여전히 위력을 떨치는 드라마 현실에선 너무 앞서간 전략"이라고 말했다. 혁명가 전봉준의 고뇌와 인간적 면모 등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대중의 욕구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해온 고부 관아의 이방 백가(박혁권)의 배다른 두 아들이자 운명이 엇갈리는 백이강(조정석, 동학군 별동대장)과 백이현(윤시윤, 일본군 앞잡이),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 보부상 송자인(한예리) 등 격동의 시대 다양한 인간군상의 욕망과 심리를 역사적 사실에 잘 꿰어낸다.

드라마 '녹두꽃'의 주인공인 백이강(조정석, 왼쪽)과 백이현(윤시윤). 배다른 형제인 이들은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엇갈린 길을 선택한다. 백이강은 동학군 별동대장이 되고, 백이현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일본군의 편에 선다. [SBS]

드라마 '녹두꽃'의 주인공인 백이강(조정석, 왼쪽)과 백이현(윤시윤). 배다른 형제인 이들은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엇갈린 길을 선택한다. 백이강은 동학군 별동대장이 되고, 백이현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일본군의 편에 선다.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보부상 송자인(한예리)은 뒤늦게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보부상 송자인(한예리)은 뒤늦게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SBS]

시청률은 아쉽지만 드라마의 의미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윤석진 평론가는 "반드시 재조명돼야 할 동학혁명을 소재로 했다는 것부터가 '녹두꽃'의 커다란 성취"라며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무능한 조선 조정, 일제의 치밀한 조선침탈 전략 등 당시 시대상이 세밀히 묘사된 점도 매우 인상적"이라고 평했다.

드라마는 침략 야욕을 드러낸 일본이 경복궁을 무력 점령하자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고종,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채 청나라만 믿고 일본을 과소평가하다 결국 파국을 부르는 민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또다시 거병하는 동학군 등 당시 숨 가쁘게 돌아갔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강대국들 틈에 끼어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나라, 위기 앞에 사리사욕만 챙기며 정쟁을 일삼는 기득권 세력, 의지할 곳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살길을 모색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민초 등 125년 전 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과 공명하는 부분도 많다.

"지금의 시대와도 통하는 이야기" 

숙명여대 강혜경 교수(역사문화학과)는 "구한말 동학 농민들이 외쳤던 사회 정의나 경제 정의가 과연 지금은 얼마나 개선됐느냐는 묵직한 화두를 '녹두꽃'이 이 사회에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덕현 평론가는 "드라마에 그려진 구한말 민초들의 삶과 선택은 지금 시대의 상황과도 통하는 맥락의 얘기들"이라며 "동학혁명의 뜨거웠던 사회변혁 의지가 촛불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볼 때, 결코 실패의 역사로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우금치 전투라는 비극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조선 관군의 현대적 전술과 신식 기관총 총구 앞에 농민들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갔던, 동학군 최후의 전투다. 이후 전봉준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가속화된 건 익히 알려진 역사다.
윤석진 평론가는 "무능한 정치와 기득권 세력의 탐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고통받으며 하루하루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민초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며 "그런 사실을 '녹두꽃'이 상기시켜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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