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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부터 4배 커질 'EITC 마법'…최저임금 사실상 1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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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5년 한국의 최저임금에 대해 이례적으로 장문의 코멘트를 냈다. (편의상 번호를 붙이는 방식으로 분류해 소개한다.)

한국 최저임금제도에 대한 OECD의 2015년 권고

①최저임금 정책의 효과성은 최저임금 수준(너무 높으면 일자리 감소를 초래할 수 있음)과 조세 및 사회적 급부에 따라 근로자들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최저임금을 받는지에 좌우된다.

②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을 더 높여주는 근로장려급부제도(EITC)는 잘 설계되고 적정 수준의 최저임금과 결합할 경우 높은 최저임금에 우선적으로 의존하는 전략보다 근로 빈곤 퇴치에 더 효과적이다.

③한국은 이미 EITC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좀 더 급부를 늘리고 지원대상을 세심히 선정할 필요가 있다.

④이러한 정책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가구들이 일을 통해 더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최저임금 인상 압력을 줄일 수 있다.

OECD가 한국에 이런 권고를 할 당시 최저임금은 시급 5580원이었다. 2009년부터 4~6% 인상률을 기록하다 직전 2년 연속 7%대의 인상률을 기록했던 시기다.

현재 적용 중인 최저임금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그런데도 OECD는 최저임금의 시장 기능 교란을 우려했다. 빈곤과 소득분배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 정책의 불합리성을 지적했다. 빈곤은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다. 이를 최저임금 인상으로 풀려고 하는 발상은 국가가 져야 할 의무를 기업에 떠넘기는 것이다. OECD 권고의 논점은 여기에 있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이 26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최저임금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이 26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최저임금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저임금 높여서 빈곤·소득분배 풀려는 것은 국가의 의무를 사업주에 떠넘기는 행위

최저임금 정책이 효과를 내려면 조세제도와 사회안전망을 결합해 최저임금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저임금을 높여서 소득을 올리고, 빈곤을 퇴치하겠다는 정책은 빈곤 또는 소득분배 정책으로서의 효용가치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했다.

복지분야 석학인 닐 길버트 UC 버클리대 교수는 "EITC(근로장려금 또는 근로장려세제, 근로장려급부제)가 저임금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며 "EITC는 정부가 근로자에게 직접 지원하지만 최저임금을 올리면 고용주가 그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를 안다. 그러나 재정 부담을 우려해 그동안 EITC 확대를 주저했다.

EITC 활용하면 최저임금 올리지 않고도 소득 향상

EITC는 일을 하지만 소득이 적은 근로자와 사업자 가구에 세금 환급 형태로 국가가 소득을 보전해주는 장려금 제도다. 18세 미만 부양자 수에 따라 자녀 장려금도 준다.

기본적으로 일을 하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최저임금과 취지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지 않고도 소득 향상·보장을 꾀할 수 있는 제도다. 근로 빈곤층의 소득보전을 위한 사회안전판인 셈이다.

9월부터 EITC 확대…예산도 4조가량 늘려

정부가 올해 9월부터 EITC를 크게 확대한 이유다. 우선 지원받을 수 있는 소득 수준을 조정했다.

지금까지는 단독가구는 연간 1300만원 미만, 홑벌이 가구는 2100만원 미만, 맞벌이 가구는 2500만원 미만이어야 EITC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극소수의 빈곤층만 대상으로 한 셈이다. 이 기준이 9월부터 2000만~3600만원 미만으로 확대된다. 이전까지 250만원이던 최대 지원액(세금 환급액)도 300만원으로 늘렸다. 연령 제한은 없앴다. 일하면 누구에게나 주겠다는 것이다. 1억원이던 재산요건은 2억원으로 넓혔다.

이를 위해 정부는 매년 1조원 정도이던 예산을 4조9000억원으로 확 늘렸다.

EITC 확대로 최저임금 인상 요인 많이 사라져

EITC가 이처럼 크게 확대되면서 최저임금 정책의 속도 조절에도 여유가 생겼다. 돈을 적게 번다고 사업주에게 임금을 더 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적은 돈을 번 근로자에게 국가가 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실질적으로 소득을 보전해주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따른 영세 상공인의 붕괴를 막기 위해 매년 3조원가량씩 쏟아붓는 일자리 안정자금을 훨씬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더욱이 일자리 안정자금이 퍼붓고 마는 것이라면 EITC는 근로 현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고용시장의 순기능도 촉진한다.

올해 1월 2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상가에 폐점정리를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도·소매업의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는 78만 2천명으로 전년(83만 8천명) 보다 5만 6천명(6.6%) 줄었다. [뉴스1]

올해 1월 2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상가에 폐점정리를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도·소매업의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는 78만 2천명으로 전년(83만 8천명) 보다 5만 6천명(6.6%) 줄었다. [뉴스1]

최저임금 인상, 고용감소로 이어지면 소득분배 악화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분배 개선 효과를 내기보다 고용 감소로 이어지면 소득분배를 되레 악화시킬 수 있다. 올들어 정부 통계에서 이미 확인됐다.

더욱이 한국은 최저임금 근로자의 상당수가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 있어 빈곤 완화를 노린 최저임금 정책은 효율성이 떨어진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저임금이 시급 6030원이던 2016년 9월 최저임금 미만 근로자 가운데 빈곤층 확률은 30.5%로 추정했다.)

EITC 확대는 현 정부가 신경 쓰는 소득불균형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지난 9일 국회 예산정책처가 발표한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올해 EITC 확대로 2017~2018년보다 소득불균형 지수가 2.8배까지 개선될 것으로 전망됐다. 최저임금보다 훨씬 효율적인 셈이다.

EITC, 최저임금, 기초생활보장제 등 여러 정책 장점 조합해야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사업주와 근로자가 합의 하에 임금을 낮추고 정부의 장려금을 수령하는 형식의 꼼수가 등장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다양한 사회안전망 정책의 조합이 필요하다.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전 통계청장)는 "EITC는 국가가 조세제도로 소득을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업주 부담을 줄여 고용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감소시키고, 빈곤 감소에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그러나 "EITC도 정부 재정 부담과 부정수급 등의 한계를 갖고 있다"며 "따라서 EITC와 최저임금, 기초생활보장제 같은 각종 사회복지제도의 장단점을 파악해 잘 조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이 기사 작성을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개발연구원(KDI),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국회 예산정책처의 관련 자료와 이정민 서울대 교수, 윤윤규 박사 등 다수의 학술자료를 참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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