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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처럼…냄새는 메시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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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좋은 공간을 만드는 요소로 냄새가 주목받고 있다. 특별한 공간 경험을 위해 섬세하게 향을 만들고 꽃향, 과일향 일색에서 풀향, 나무향 등 향기의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서울 서촌에 있는 향수 공방 '그랑핸드'가 만든 인센스 스틱. [사진 그랑핸드]

좋은 공간을 만드는 요소로 냄새가 주목받고 있다. 특별한 공간 경험을 위해 섬세하게 향을 만들고 꽃향, 과일향 일색에서 풀향, 나무향 등 향기의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서울 서촌에 있는 향수 공방 '그랑핸드'가 만든 인센스 스틱. [사진 그랑핸드]

 관객을 900만 명을 넘어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냄새의 영화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를 지하실 혹은 반지하 냄새로 형상화했다. 후각은 감각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고 즉각적 반응을 끌어낸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맡아본 퀴퀴한 지하실 냄새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선연한 가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미술관 연필향, 호텔 소나무향… #일상 속으로 파고든 향기 디자인 #가정·택시·예식장 등 공간별 특화 #룸 스프레이·오일버너 등도 나와

의식하지 않은 사이 냄새는 코를 통해 들어와 기억을 지배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공간의 냄새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곳이 많아졌다. 집에 디퓨저와 향초 등을 놓고 룸 스프레이를 뿌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탈취·항균·방향제 등 국내 향기 제품 시장은 3조원 규모다. 업계에선 이 시장이 매년 10%씩 성장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부티크 호텔 레스케이프에서는 18세기 파리의 낭만적인 감성을 담은 공간을 위해 장미 베이스의 향을 개발해 사용하고, 관련 향 제품을 판매한다. [사진 레스케이프]

서울 명동에 위치한 부티크 호텔 레스케이프에서는 18세기 파리의 낭만적인 감성을 담은 공간을 위해 장미 베이스의 향을 개발해 사용하고, 관련 향 제품을 판매한다. [사진 레스케이프]

요즘에는 공간의 냄새를 그저 좋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후각이라는 섬세한 감각을 활용, 브랜드 호감도를 높이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택시 이용자의 단골 불평 사항으로 지적되는 실내 냄새를 개선하기 위해 차량 공유 서비스 ‘타다’는 차 안에 직접 조향한 디퓨저를 놓는다. 호텔 업계에서의 향기 마케팅은 잘 알려진 시도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의 로비에 들어서면 은은한 소나무 향이 난다. 한국 전통 한옥을 연상시키는 향으로 외국 손님들이 집에 돌아가도 한국의 경험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더플라자호텔은 직원들의 옷에 뿌리는 섬유탈취제에도 직접 개발한 향을 사용한다.

디뮤지엄 '아이 드로(I DRAW)' 전에서는 향을 전시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다. 피에르 르탕 작가의 공간에는 작가의 실제 오래된 집에서 나는 월계수 향을 베이스로 한 향을 더했다. [사진 디뮤지엄]

디뮤지엄 '아이 드로(I DRAW)' 전에서는 향을 전시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다. 피에르 르탕 작가의 공간에는 작가의 실제 오래된 집에서 나는 월계수 향을 베이스로 한 향을 더했다. [사진 디뮤지엄]

향은 공간의 특징을 보다 명확하게 만든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올해 2월부터 열리고 있는 전시 ‘아이 드로(I draw)’에서는 16명의 아티스트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공간마다 다른 향을 만들어 전시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 ‘그림을 그린다’는 제목에서 착안한 연필 흑연 향과 지우개 고무 향이 난다. 조향을 맡은 코스메틱 브랜드 ‘탬버린즈’의 유주연 조향사는 “공간에 후각적인 요소를 더해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들을 극대화했다”며 “관객들은 향을 통해 전시된 작품의 색감과 스토리를 강렬하게 인식한다”고 했다.

공공헌책방 '서울책보고'에 들어서면 향긋한 책 냄새가 난다. 정원에서 책을 읽을 때 바람에 실려오는 책 향기를 형상화해 개발한 향이다. 김현동 기자

공공헌책방 '서울책보고'에 들어서면 향긋한 책 냄새가 난다. 정원에서 책을 읽을 때 바람에 실려오는 책 향기를 형상화해 개발한 향이다. 김현동 기자

서울 송파구에 지난 3월 문을 연 공공헌책방 ‘서울책보고’에 들어서면 책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약 17만권의 장서가 있는 거대한 서가이기에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실은 책 냄새가 아니라 ‘책보고원(圓)’이라는 향을 개발해 사용한 결과다. 자연스러운 책 냄새에 정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상쾌한 향을 더했다. 교보문고는 나무와 바람 향을 형상화한 ‘책향’을 개발해 사용한다.

공간에 활용하는 향도 다양해졌다. 공간 향 컨설팅을 하는 부티크 퍼퓨머리 메종드파팡의 김승훈 대표는 “예전에는 과일이나 꽃향 등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향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웠지만, 요즘에는 점차 공간의 특성에 따라 무거운 나무 향, 가벼운 풀 냄새 등 독특한 향취를 선택하기도 한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이스라이브러리’는 한방 화장품이라는 컨셉트에 맞게 ‘차분한 독서가’라는 이름의 향으로 공간을 채우고 관련 향 제품도 판매한다. 촉촉한 풀과 나무 향기에 선비의 서재에서 풍기는 묵향(墨香)을 더했다.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챕터원 에디트는 쑥·깻잎·소나무·이끼 등 독특한 향취를 조합해 매장의 시그너처 향을 만들었다. 아시아 지역 수공예품을 주로 취급하는 공간과 어울리도록 약 2년간 공들여 개발했다.

쑥, 깻잎, 소나무 등 동양적인 재료의 향을 담은 시그너처 향, '수목원' 향으로 공간을 짙게 채운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챕터원' 쇼룸. 최정동 기자

쑥, 깻잎, 소나무 등 동양적인 재료의 향을 담은 시그너처 향, '수목원' 향으로 공간을 짙게 채운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챕터원' 쇼룸. 최정동 기자

챕터원 구병준 대표는 “시각뿐 아니라 소리나 향과 같은 요소를 활용해 고객들이 공간에서 다양한 감각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며 “이런 고객 경험은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중요하다”고 했다. 향 디자인 브랜드 ‘센토리’의 김아라 대표는 “요즘 소비자는 단순히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자체를 소비하고 경험하려 한다”며 “후각 등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소비자가 브랜드에 친근함을 느끼는 등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했다.

향은 때로 추억을 일깨운다. 웨딩 공간 ‘아펠가모’는 은방울꽃에서 영감을 얻은 시그너처 향을 개발해 공간에 사용한다. 같은 향을 디퓨저로 제작해 이 공간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에게 결혼 100일이 되면 선물로 보내준다.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을 간직하라는 의미다. 향기 마케팅 전문회사 ‘센트온’의 유정연 대표는 “공간의 향은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표현한 것”이라며 “최근에는 섬세한 조향 기술을 통해 ‘울창한 숲속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향’처럼 감정과 분위기를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고 했다.

예식장 '아펠가모'는 결혼식 당시의 공간 향을 디퓨저에 담아 신혼부부에게 보내주는 서비스를 한다. [사진 아펠가모]

예식장 '아펠가모'는 결혼식 당시의 공간 향을 디퓨저에 담아 신혼부부에게 보내주는 서비스를 한다. [사진 아펠가모]

공간에 효과적으로 향을 퍼트리기 위한 도구도 진화하고 있다. 향초나 디퓨저 일색에서 최근에는 향수처럼 공간에 뿌리는 룸 스프레이, 사찰 등에서 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기다란 형태의 인센스 스틱 등으로 세분화했다. 오일 형태의 향료 원액을 구멍이 뚫린 현무암 위에 떨어트려 공간에 퍼트리거나, 도자기 그릇에 향료를 담은 뒤 버너로 달구어 향을 퍼트리기도 한다.

편집숍 '오르에르 아카이브'에서는 매일 달라지는 날씨와 공기에 따라 교토의 향방 '훈옥당'의 11가지 향 중 하나를 태운다.[사진 오르에르 아카이브]

편집숍 '오르에르 아카이브'에서는 매일 달라지는 날씨와 공기에 따라 교토의 향방 '훈옥당'의 11가지 향 중 하나를 태운다.[사진 오르에르 아카이브]

냄새는 선을 넘는다. 의식하지 않은 순간 스며들어 마음의 경계를 무너트린다. 공간 향도 마찬가지다.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쩐지 좋은 느낌의 공간을 만드는 데 냄새라는 감각의 기억은 지대한 역할을 한다. 공간을 만들 때 어울리는 냄새와 향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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