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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까지 씨말린 6·25 폐허에… '노아의 방주' 기적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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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69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와중에 한반도는 피로 물들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전사한 군인은 양측을 통틀어 87만6636명(납치·실종 제외), 남북한 민간인 인명 피해는 249만명(부상·납치·실종 포함)이나 됐다. 전체 인명 피해는 300만명이 넘는다.

6.25 직후 미국 NGO인 헤퍼 인터내셔널이 보내준 젖소와 함께한 한국 어린이들. [사진 헤퍼 인터내셔널]

6.25 직후 미국 NGO인 헤퍼 인터내셔널이 보내준 젖소와 함께한 한국 어린이들. [사진 헤퍼 인터내셔널]

전쟁통에 사람뿐 아니라 소·돼지·닭·염소·젖소·양 등 가축도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농촌경제연구원이 발간한 『농업·농촌 70년 보고서』에 따르면 1949년 61만 마리였던 한우는 전쟁통에 39만 마리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젖소는 1006마리에서 780마리로 줄었다. 대한제국 시절이던 1902년 홀스타인 젖소 20여 마리가 처음 들어오면서 시작된 대한민국 낙농업 기반은 전쟁으로 붕괴했다. 정부가 축산 진흥정책을 내놓은 것은 전쟁이 끝난 지 9년이 지난 1962년이었다. 남양유업(64년)과 한국낙농가공(매일유업 전신, 69년) 등이 잇따라 설립되면서 낙농업이 차츰 재건된다. 이 덕분에 2017년 한우와 젖소는 각각 342만 마리와 40만 마리로 늘었다. 1인당 우유 소비량은 1970년 1.6kg에서 2017년 79.5kg으로, 1인당 육류 소비량은 1957년 3.6kg에서 2017년에는 선진국 수준인 49.1kg으로 증가했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미국 경제 원조와 한국 축산업 부활 비사] #300만 사망, 가축도 대거 피해 #'우유보다 젖소' 철학 미 NGO #암송아지·염소·돼지·닭·토끼 등 #'종자용 가축' 21만마리 보내줘 #붕괴된 한국 축산업 부활 도와 #이제는 한국이 네팔 농촌 지원 #

그런데 전쟁 와중에 사실상 끊어진 한국 축산업의 명맥을 잇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농민의 노력이 컸지만, 해외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모른다. 거기에는 숨겨진 '역사의 고리'가 있다.

 미국 NGO인 헤퍼 인터내셔널이 1972년 항공편으로 한국에 보내준 젖소들. [사진 헤퍼 인터내셔널]

미국 NGO인 헤퍼 인터내셔널이 1972년 항공편으로 한국에 보내준 젖소들. [사진 헤퍼 인터내셔널]

공짜 우유보다 가축 제공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난 농부이자 기독교도인 댄 웨스트(1893~1971)는 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피난민들에게 우유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목도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기아와 빈곤에 빠진 사람들을 구할 방안을 고민한다. 자선 구호 비영리기관(NGO)인 '헤퍼인터내셔널(Heifer International, 2020년 헤퍼코리아 설립)을 44년 설립했다. 그는 당장 우유 한잔을 공짜로 주는 것보다는 가난한 농민이 받은 가축을 길러 자립하도록 유도하는 것(not a cup, but a cow)이 길게 보면 가난 극복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선단체 이름을 암송아지란 뜻을 지닌 헤퍼로 정했다.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teach a man to fish)는 격언을 실천했다. 헤퍼 취지에 공감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빌 게이츠가 후원자다.

헤퍼는 전쟁의 참화에 휘말린 한반도를 주목한다. 유엔 결의로 창설된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과 함께 51년 산란계용 종란(種卵) 보내기 사업을 계획해 52년 4월 4일 21만개의 종란이 미군 수송기 편으로 한국에 도착해 전국의 부화장으로 보내졌다.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들은 어미 닭으로 자랐고 다시 알을 낳아 전쟁고아들을 먹였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 NGO가 보내준 염소와 함께한 한국 어린이들. [사진 헤퍼 인터내셔널]

한국전쟁 직후 미국 NGO가 보내준 염소와 함께한 한국 어린이들. [사진 헤퍼 인터내셔널]

54년까지 헤퍼는 돼지 331마리, 염소 222마리, 닭 70마리, 토끼 500마리, 벌통 200개를 한국에 보냈다. 52년부터 76년까지 모두 44회에 걸쳐 가축 3200여 마리(종란 제외)를 전국 17개 지역에 보냈는데 여기에는 60년대에 처음 들어온 젖소 897마리, 황소 58마리(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보낸 황소 포함)도 들어 있다.

기자가 헤퍼 본사를 통해 입수한 내부 자료를 보니 가축은 부산 애아원과 이사벨 고아원, 마산 애리원 등으로 보내졌다. 축산 농장과 연세대에도 전달됐다. 이들 가축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이름을 딴 해군 수송선을 타고 '귀하신 몸' 대접을 받으며 한국으로 실려 왔다.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미국, 축산업 일궈준 '경제 동맹'

경북 안동에 사는 이재복(82)씨는 미국 NGO인 헤퍼 인터내셔널이 1973년 보내준 젖소 두마리를 키워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이 대를 이어 농장을 운영한다. 장세정 기자

경북 안동에 사는 이재복(82)씨는 미국 NGO인 헤퍼 인터내셔널이 1973년 보내준 젖소 두마리를 키워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이 대를 이어 농장을 운영한다. 장세정 기자

그런데 헤퍼는 76년 돌연 한국에서 철수한다. 한국의 축산 기반이 어느 정도 회복됐다고 판단해서다. 공교롭게도 그해 남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807달러로 북한(772달러)을 처음 추월했다. 한국과 미국은 6·25전쟁 때 침략자에 맞서 피 흘리며 싸운 '안보 동맹'이었을 뿐 아니라 전후의 폐허 위에서 굶주림과 가난에 맞서 축산업을 일군 '경제 동맹'이었던 셈이다.

경북 안동에서 2대째 축산업을 하는 이재복(82)씨는 헤퍼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씨는 "49년 대전에서 설립된 '기독교 연합 봉사회' 산하 농민학원에서 선교사들이 한국의 청년 농부들에게 축산기술을 가르쳤고 거기서 배운 농민들은 전국으로 가서 축산업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 이씨도 고향으로 돌아가 69년에 가축 인공수정사 면허를 땄고 헤퍼 후원자가 기증한 젖소 두 마리로 1973년부터 축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덕분에 가난을 벗어났다고 한다.

이씨 등 한국 농민 8명은 감사의 뜻을 표하러 88년 미국에 거주하는 헤퍼 후원자들을 찾아가 만났다. 농민 8명이 1인당 새끼젖소 1마리씩 살 수 있는 성금을 모아 7300달러를 89년 중국 쓰촨(四川)성 농촌에 기부했다. 헤퍼 본사 임원들은 "전쟁의 상처를 극복한 한국 농민들이 가난한 이웃 나라 농민을 돕겠다고 나설 줄 상상도 못 했다"며 감격스러워했다고 한다.

이재복(뒷줄 왼쪽 넷째)씨 등 한국 농민 8명이 1988년 미국의 해퍼 인터내셔널을 방문해 감사를 표했다.

이재복(뒷줄 왼쪽 넷째)씨 등 한국 농민 8명이 1988년 미국의 해퍼 인터내셔널을 방문해 감사를 표했다.

이씨는 "6·25전쟁으로 사람도 가축도 수난을 당했는데 헤퍼 후원자들이 가축을 보내준 덕분에 한국의 축산업이 폐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며 "요즘 우리가 우유를 물 마시듯 하고 육류를 풍족히 먹게 된 사연을 반드시 기억하고 가난한 이웃 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보은 정신을 강조한 '음수사원(飮水思源·물을 마시면서 원천을 생각함)'의 자세다.

실제로 해방 이후 99년까지 50년간 국제사회로부터 약 128억 달러의 공적개발원조(ODA)를 받은 한국은 95년 세계은행 차관 졸업국이 됐다. 2010년에는 선진국 공여국(供與國) 클럽에 공식 가입해 도움을 받던 수원국(受援國)에서 도움을 주는 공여국으로 공인받았다. 네팔은 한국이 도움을 주는 대표적 아시아 빈국 중 하나이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중점협력국이다. 정부 지원 사업만 연간 1300만 달러고, NGO 사업 규모도 연간 80억원이다.

아시아에서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 치트완의 한 학교. 학교 시설이 열악하다. 학비가 없어 부모들은 특히 여학생 자녀의 학업을 중단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장세정 기자

아시아에서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 치트완의 한 학교. 학교 시설이 열악하다. 학비가 없어 부모들은 특히 여학생 자녀의 학업을 중단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장세정 기자

네팔에서 보은정신 실천

최근 네팔 농촌 어린이와 농민을 돕기 위해 현지로 봉사를 떠난 한국 청년들을 동행했다. 미국 다트머스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인 장원영(19)군이 2015년 네팔 대지진을 계기로 현지 아동을 돕기 위해 만든 'Hope for Nepal' 멤버들이다. 서울국제학교 학생들은 헤퍼의 '책 읽기를 통한 나눔 (Read to Feed)' 프로그램에 참여해 모은 돈 5000달러를, 세인트폴 서울 재학생들은 별도로 모은 2000달러를 들고 네팔로 갔다.

지난 16일 네팔 카트만두의 헤퍼 네팔 본사에서 니나 조시(왼쪽 둘째) 국장과 한국 청년들(왼쪽부터 권혁준, 임수빈, 정이준, 장원영)이 네팔 어린이들을 위해 모은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지난 16일 네팔 카트만두의 헤퍼 네팔 본사에서 니나 조시(왼쪽 둘째) 국장과 한국 청년들(왼쪽부터 권혁준, 임수빈, 정이준, 장원영)이 네팔 어린이들을 위해 모은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지난 16일 헤퍼 네팔 관계자의 안내로 남부 치트완 지구의 한 학교를 찾아가 여학생 10명에게 학용품이 든 가방을 선물했다. 가방을 받은 소녀들은 수줍어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영어 교사가 꿈이라는 6학년 아지나 체팡(13) 양은 고산에 있는 집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부터 4시간을 걸어서 등교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업을 듣고 다시 4시간을 산을 올라 귀가한다. 학비가 없어 그의 언니(17)는 아지나 또래에 학교를 그만뒀다. 헤퍼 네팔의 홍보책임자(레지나 레그미)는 "네팔 소녀들이 학교를 계속 다녀야 그들과 가정에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수빈(15)양은 "네팔 여자아이들을 보니 배움의 혜택을 보장받고 있는 내가 열심히 공부해 지구촌 사람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네팔 다딩 지구의 고산마을에서 한국 청소년들이 '패싱 온 더 기프트(Passing on the Gift)' 행사 차원에서 네팔 청소년들에게 염소를 전달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지난 17일 네팔 다딩 지구의 고산마을에서 한국 청소년들이 '패싱 온 더 기프트(Passing on the Gift)' 행사 차원에서 네팔 청소년들에게 염소를 전달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17일에는 다딩 지구의 해발 1000m가 넘는 산촌(찹콜라)을 방문했다. 비탈진 산에 계단식 다랑논을 일구며 억척스럽게 가난과 싸우는 농민들을 만났다. 헤퍼 네팔이 2017년 8월 '선물 나누기(Passing on the Gift)' 프로그램 차원에서 농민 25명에게 50마리의 염소를 기증했다. 농민들은 이 염소를 213마리까지 늘려 이웃 4개 마을에 염소를 기부했다. 이날 두 마을 주민들은 염소를 주고받았는데 자조·자립이 협동·공생으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희망의 민들레 홀씨'를 이웃에 전파하는 감동적 현장이었다.

네팔(2017년 인구 2930만명)의 1인당 GDP는 1030달러 수준이다. 하지만 네팔 경제는 지난 3년간 약 6.3% 성장했다. 2022년 최빈 개도국 지위를 벗어나고 2030년 중진국 진입을 목표로 한다. 한국이 경험한 것처럼 안에서 스스로 노력하고 밖에서 돕는다면 네팔이 '제2의 대한민국'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네팔 치트완 지구 학생들과 한국 청소년들이 네팔 식으로 두 손을 모은 채 "나마스테"(나는 당신을 존중한다는 의미)라고 인사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가연

네팔 치트완 지구 학생들과 한국 청소년들이 네팔 식으로 두 손을 모은 채 "나마스테"(나는 당신을 존중한다는 의미)라고 인사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가연

권혁주 국제개발협력학회 회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은 "OECD 회원국은 국민총소득(GNI)의 0.3%를 해외원조에 사용하는데 한국은 0.14%(2017년 기준)다. OECD 가입 당시 국제사회에 약속한 0.25%까지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박규민 인턴기자가 이 기사의 동영상 편집작업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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