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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던 정한근 맘 바꾼 한마디 "파나마 교도소보다 한국이 낫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해외 도피 중이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씨(55)씨가 2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송환됐다. [뉴스1]

해외 도피 중이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씨(55)씨가 2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송환됐다. [뉴스1]

회삿돈 322억원을 빼돌린 뒤 21년을 도피한 한보그룹 회장의 4남 정한근(55)씨가 파나마에서부터 한국에 송환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57시간.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파나마에서 한국까지 비행기로만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으로 빠른 송환이다. 그러나 송환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정한근, 여권 들이밀며 "난 미국 시민권자" 반발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정씨는 지난 18일(한국시각) 파나마 공항에서 붙잡힌 직후 “나는 한국인이 아닌 미국 시민권자다”라고 주장하며 한참 동안 혐의를 부인했다. 에콰도르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가기 위해 파나마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탔던 정씨는 파나마 이민청에 의해 공항에서 붙잡혀 보호소에 구금됐다. 그 과정에서 정씨는 파나마 이민청 직원들에게 스페인어로 “나는 정당한 미국 시민권자”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정씨는 미국 여권을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19일 연락을 받고 온 주파나마 한국대사관 소속 영사에게도 정씨는 계속 스페인어를 사용했다. 한국인 정한근이 아닌 에콰도르에서 온 미국 시민권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으로부터 정씨가 신분 세탁한 과정을 듣고 온 영사는 속지 않았다고 한다. 파나마주재 한국 영사는 정씨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한참을 설득했다.

"파나마 교도소보다 한국이 낫지 않냐" 설득

정씨는 “파나마에 남을 경우 파나마 법에 따라 신분세탁을 통해 여권을 부정하게 발급받은 것에 대해 처벌을 받게 된다. 파나마는 사법체계와 교도관리가 불완전한데 자칫 교도소에 들어갔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한국 영사의 말에 마음을 돌렸다. 그제서야 한국인임을 실토하고 한국행을 택했다고 한다. 정씨가 국내 송환과 파나마에 남는 것에 대한 경우의 수를 따져 결정한 것이다.

교정 인권 단체 ‘프리즌 인사이더’에 따르면 파나마 교도소에서는 한 분기에 30여명의 재소자가 사망한다. 재소자간 폭력과 에이즈가 주된 사망 원인이다. 교도소 수용률은 116%로 정원보다 많은 재소자가 교도소에 있어 과밀도 심각한 문제다. 정씨의 한국행 선택에는 이 같은 파나마의 환경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정씨의 한국 송환은 파나마·에콰도르·캐나다·미국 등 해외 기관과 국내 외교부의 도움으로 가능했다”며 “특히 파나마 한국 영사가 정씨와 마주 앉아 그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고 밝혔다.

1997년 검찰 조사를 받은 후 대검찰청 청사를 걸어나오고 있는 정한근씨. [중앙포토]

1997년 검찰 조사를 받은 후 대검찰청 청사를 걸어나오고 있는 정한근씨. [중앙포토]

상파울루-두바이 경유도 송환 전략

만약 정씨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면 정씨 송환까지는 수년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 파나마는 한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돼있지 않은 나라로 그를 국내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파나마 정부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씨가 브라질 상파울루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를 경유해 복잡하게 한국에 들어온 것도 검찰과 외교부 등의 전략이다. 만약 정씨의 한국 송환 과정에서 캐나다나 미국을 경유했다면 이들 나라는 신분세탁이 명확히 확인되기 전까지 자국민인 정씨를 보호하면서 송환을 막았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국무부와 FBI(연방수사국)는 한국과 사법공조가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 수년에 걸친 범죄인 인도 소송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외교 문제로 확장될 수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브라질과 두바이를 경유해 송환이 이뤄졌다.

프랑스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2017년 6월 인천국제공항에 송환된 유병언(사망) 전 세모그룹 회장의 장녀 유섬나씨. [연합뉴스]

프랑스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2017년 6월 인천국제공항에 송환된 유병언(사망) 전 세모그룹 회장의 장녀 유섬나씨. [연합뉴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장녀인 유섬나씨는 2014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체포됐지만 유럽인권재판소에 송환 불복 소송을 제기해 3년이 더 지나서야 강제 송환이 가능했다. ‘이태원 살인사건’의 주범 아서 존 패터슨은 2011년 미국에서 검거됐지만 법원의 범죄인 인도 결정에 항소하면서 4년이 지난 2015년 국내에 들어와 재판을 받았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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