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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어머니, 배달 치킨 들더니 "세상에 이런 맛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한세의 노인복지 이야기(31)

당신의 소확행은 무엇인가? 최근 조사에 따르면 소확행을 느끼는 대상으로 혼술이 가장 많다고 한다. 하지만 행복을 느끼는 일상의 작은 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에 따라 반려동물, 음식, 기도, 식물 가꾸기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사진 unsplash]

당신의 소확행은 무엇인가? 최근 조사에 따르면 소확행을 느끼는 대상으로 혼술이 가장 많다고 한다. 하지만 행복을 느끼는 일상의 작은 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에 따라 반려동물, 음식, 기도, 식물 가꾸기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사진 unsplash]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게르한스섬의 오후』에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1986년 집필한 이 수필집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일상 속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새로 구매한 면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이처럼 행복을 찾기 위해 일상의 작은 것에 주목한다.

요즘 ‘소확행’이라는 신조어가 한국에서도 인기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는 소확행을 2018년의 트렌드 중 하나로 선정했다. 같은 해 취업포털 ‘커리어’에서 구직자 4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51.8%가 행복 키워드 1위로 소확행을 꼽았다.

이들이 소확행을 느끼는 대상으로 ‘혼술(50%)’이 가장 많았고 ‘반려동물(19.8%)’ ‘음식(14.5%)’ ‘커피(8.3%)’ ‘취미(4.4%)’ ‘가족(2.4%)’이 뒤를 이었다. 소확행이 사랑받는 이유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적은 비용으로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80대 노모의 소확행은 음식·기도·화초

80대 후반인 나의 어머니도 미래(사후 세계)에 대한 확실성이 없으며 적은 비용으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원한다. 옆에서 관찰한 어머니의 소확행 키워드는 음식, 기도, 화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아내의 식단에 어머니의 식욕 본능이 되살아났다. 막 김이 피어오르는 새우살을 넣은 계란찜, 큼직한 두부가 속살을 보이는 청국장, 연어 샐러드 등. 아내가 손쉽게 준비할 수 있는 메뉴 한 가지만 있어도 어머니는 맛난 것을 앞에 둔 아이처럼 들뜬 소녀가 된다.

식사 기도를 드린 후 어머니는 종종 “내가 이렇게 말년에 먹는 재미로 살게 될 줄 몰랐다. 아마도 예수님이 나에게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맛난 것 많이 먹고 오라고 배려하는 모양”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리곤 “그래, 몸도 편치 않은 내가 뭐 그리 매일 재미있는 일이 있겠니.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큰 즐거움 중 하나구나”라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어머니의 소확행 중 하나는 '먹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맛있는 음식들을 맛볼 때면 아이처럼 즐거워하신다. 나에게는 익숙한 것이 어머니에게는 새로움으로 다가간다. 사진은 어머니가 즐기는 호두(위)와 행복이 깃든 간식 창고(아래). [사진 이한세]

어머니의 소확행 중 하나는 '먹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맛있는 음식들을 맛볼 때면 아이처럼 즐거워하신다. 나에게는 익숙한 것이 어머니에게는 새로움으로 다가간다. 사진은 어머니가 즐기는 호두(위)와 행복이 깃든 간식 창고(아래). [사진 이한세]

한번은 인테리어를 하는 친구 부부가 집으로 와 전등 교체공사를 하는데 점심시간이 됐다. 점심을 준비할 상황이 아니어서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프라이드치킨을 배달시켰다. 막 배달된 따끈한 프라이드치킨을 한입 베어 문 어머니가 “참으로 맛있구나. 세상에 닭튀김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아버지 작고 후 15년간, 혹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어머니는 프라이드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자녀들은 어머니를 대접한다고 늘 고깃집이나 한정식집으로 모셨고, 어머니 혼자만을 위해 프라이드치킨을 배달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트에서 판매하는 가쓰오 우동을 끓여 파와 김만 토핑해 드려도 어머니에게는 또 다른 세계의 음식이다. 아내가 직접 국물까지 만든 줄 알고 어쩜 이렇게 요리를 잘하느냐고 감탄한다.

프라이드치킨과 가쓰오 우동에 감탄하는 어머니를 보고 다양한 형태의 간식도 준비했다. 그중 어머니가 치즈 맛 아이스크림, 땅콩 초콜릿, 민트 맛 사탕, 캐슈너트가 들어간 하루견과, 아몬드로 덮은 얇은 구운 과자와 호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파악하는데 보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러한 간식류를 봉지째 사 어머니 간식 전용 수납공간을 만들어 채워 놓았다. 간식 수납장 문을 열고 “어머니 여기 좋아하시는 것 많이 사다 놓았어요” 하면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는다. 나에게는 그저 그런 주전부리가 어머니에게는 소확행이다.

기도는 어머니 삶의 일부였다. 요즘은 기도에 조금 더 재미를 붙인 듯하다. 아침 일찍 성무일도, 하루 세 번 삼종기도, 저녁에 저녁기도뿐 아니라 틈만 나면 기도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린다. 밖에서도 잔잔하게 기도 소리가 들린다. 천주교 기도문 중에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며 자신의 가슴을 세 번 치면서 드리는 짧은 기도문이 있다. 하루 서너 시간 이상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이 구절이 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도를 하고 화초를 가꾸는 것도 어머니를 행복하게 한다. 어머니는 잡초마저도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 맛있는 음식, 진정으로 드리는 기도, 푸릇한 화초 모두 어머니를 즐겁게 하지만 그보다 더 행복을 주는 존재는 '가족'이다. [사진 이한세]

기도를 하고 화초를 가꾸는 것도 어머니를 행복하게 한다. 어머니는 잡초마저도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 맛있는 음식, 진정으로 드리는 기도, 푸릇한 화초 모두 어머니를 즐겁게 하지만 그보다 더 행복을 주는 존재는 '가족'이다. [사진 이한세]

가끔 어머니 의견에 아내가 토를 달거나 고부 갈등 직전까지 갈 때는 내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그런데 자존심이 상한 어머니가 약간 안색이 안 좋아지다가도 하루가 지나면 영락없이 밝은 미소로 다시 돌아온다. 십여 년이 넘게 매일 기도를 하면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수십만 번 되뇌었을 것이다.

그렇게 기도 내공이 쌓인 어머니가 기도 중에 스스로 불편한 마음을 다스리고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오는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기도를 통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본인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도 또한 소중한 소확행일 것이다.

어머니 소확행의 근간은 가족

매일 화초에 물을 주고 꽃을 바라보는 것도 어머니 일과 중 하나다. 새로운 꽃봉오리가 솟아오르면 다른 오래된 꽃봉오리가 그 자리를 살그머니 비켜준다며 신기해한다. 어제는 꽃망울이었는데 오늘은 살포시 피기 시작했다고 좋아한다. 색이 엷은 새잎이 돋아나니 그 밑의 잎이 시드는 걸 아쉬워하기도 한다. 잡초가 무성한 화분을 보면서, 녹색이 보기 좋으니 뽑지 말자고 해 그대로 두었다. 내 눈에는 잡초로 보이는데 어머니에게는 화초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사무실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아내와 나는 지난 4주 동안 거의 집을 비우다시피 했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내 걱정하지 말고 사무실 일에 전념하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어제야 겨우 급한 일이 마무리돼 사무실이 정상을 되찾아 다시 예전처럼 집에서 출퇴근하게 됐다.

아내가 어머니가 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얘야, 15년간 혼자 살아왔지만 너희와 5개월 살아보니, 이제 예전처럼 혼자 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지난 4주간의 우리가 없던 공백이 어머니에게 컸던 것이다. 어머니 소확행의 근간은 결국 가족이다.

이한세 스파이어리서치&컨설팅 대표이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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