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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혼자 있는 집에 에어컨 달 때, 옷깃이라도 스치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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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호 07면

이사철, 출장 기사의 세계 

도배·타일·조명·에어컨…. 이사를 전후해 만나게 되는 출장 기사들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단기 임시직,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20·30대 젊은이들이 출장 기사로 나서는 경우가 늘고 있다. 20만원 이상의 일당을 받을 수 있는 출장 기사가 매력적인 대안이 되는 셈이다. 타일 기사의 경우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학원에는 정원의 2~3배씩 몰리기도 한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일거리가 줄어들면서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는 날씨 속에서 대부분 임시직·일용직·특수고용직인 출장 기사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부상 위험을 무릅쓰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출장 기사 최성하씨의 하루 #구설 피하려고 현관문 열고 작업 #5만 명 경쟁, 12년째 같은 전화번호 #고객 화장실 못 쓰는 게 가장 불편 #하루 6건 여름 지나면 체중 10㎏ 쏙

12년차 에어컨 설치·수리 기사 최성하씨가 배관·전동드릴 등으로 ‘무장’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12년차 에어컨 설치·수리 기사 최성하씨가 배관·전동드릴 등으로 ‘무장’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20만원만 받겠습니다. 25만원 받기에는 제가 한 일이 적네요.”

지난 9일 종로구 숭인동의 한 아파트. 에어컨 매립 배관을 수리하던 최성하(38)씨는 집주인에게 5만원을 돌려줬다. 그는 ‘최뚝딱’으로 불리는 12년차 에어컨 설치·수리 기사다. 지난해 무더위에 이어 올해에도 더위가 일찍 찾아오면서 요즘 눈코 뜰 새가 없다. 최씨와 조수 정지대(27)씨의 숨 가쁜 하루를 동행했다.

#07:30 양천구 신월동

최씨는 1t 트럭을 몰며 수원시 장안동으로 향하면서도 계속 고객 전화를 받았다. 최씨는 “하루 평균 20통을 받지만 지난해 한여름엔 하루 200통을 받은 적도 있다”며 “그때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일하다보니 체중이 10㎏ 빠지더라”고 말했다.

오늘 4건인데 띄엄띄엄 일하는 것 같다.
“하루 5~6건까지는 가능하다. 고객에게 소홀해질 수 있어 과한 업무는 제한하고 있다.”
대기업 하청업체가 아니라 사설업체인데, 신뢰가 중요하겠다.
“물론이다. 일만 처리하고 가면 안 된다. 고객에게 작업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실패한 출장이다. 12년간 전화번호도 안 바꾸고 명함 10만 장쯤 뿌렸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15:00 강서구 공항동

‘최뚝딱’은 이날 오전 수원시 장안동에서 에어컨 수리를, 안산시 고잔동에서는 에어컨 설치 작업을 했다. 고잔동의 집주인은 고맙다며 오징어덮밥을 시켜줬다. 최씨는 융숭한 대접이라며 되레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식사시간은 2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최씨는 다시 트럭에 앉아 서울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출장은 어디까지 다니나.
“제주도 빼곤 다 간다. 전국에 이름을 알릴 수 있어 우리에겐 좋은 기회다. 게다가 비수도권 고객들이 공임을 더 많이 쳐준다.”
경쟁이 심하겠다.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기술력이 되면 독립한다. 전국의 에어컨 기사가 5만 명이다. 포화상태다. 가격 경쟁도 심하다. 계절적 요인이 많은 에어컨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보일러 시공도 함께 하는 기사들도 많다.”

최씨는 장씨와 함께 공항동의 장애인재활센터에 설치된 기존 에어컨을 떼어내고 새 에어컨을 설치했다. 홀로 작업하는 사람도 있지만 최씨는 2인1조가 효과적이라고 했다. 최씨가 1층 방에서 벽걸이 에어컨을 설치하는 동안 장씨는 밖에서 배관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이 작업은 ‘최뚝딱’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재능기부였다.

에어컨 설치·수리 기사 최성하씨의 공구들. 그는 "제주도 빼곤 모든 지역에 출장 간다" 말했다. 김홍준 기자

에어컨 설치·수리 기사 최성하씨의 공구들. 그는 "제주도 빼곤 모든 지역에 출장 간다" 말했다. 김홍준 기자

#19:00 종로구 숭인동

가는 길에 ‘최뚝딱’ 일행과 6000원짜리 냉면을 입에 쓸어 담 듯 해치웠다. 이번에도 식사 시간은 20분을 넘지 않았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라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겠다.
“일하면서 제일 불편한 건 고객 화장실을 이용 못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화장실 쓰는 걸 꺼리는 분들이 많아 아예 쓰겠다고 부탁하지 않는다. 급하더라도 아파트 지하주차장이나 근처 상가의 화장실을 이용한다.”
다른 불편한 점은 없나.
“가끔, 아주 가끔 우리가 막일한다며…. 우린 엄연한 기술자다.”
실내 작업할 때 슬리퍼를 신는 이유가 있나.
“일하면서 가장 죄송한 게 발 냄새다. 안전화만 신다보면 발 냄새가 진동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집에 혼자 있는 여자다. 옷깃이라도 스치면 안 된다. 현관문을 열어놓고 작업해야 한다. 미심쩍은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면 밥줄이 끊긴다. 에어컨 기사 중에 성추행·성폭행 논란이 심심치 않게 튀어나온다.”

마지막으로 숭인동 아파트 작업을 마치고 양천구 신월동 사무실에 도착하니 오후 10시다. 최씨는 “6·7·8월 발 냄새 진동하도록, 10㎏ 빠지도록 뛴 뒤 휴가를 떠날 계획”이라며 “휴가지 숙소 내 에어컨만 쳐다볼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아내와 세 아이의 가장인 그는 활짝 웃으며 17시간 만에 집으로 향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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