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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면 사람도 짐… 정리해야 할 모임 판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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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36)

은퇴 후에는 일로 만들어진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모임을 만드는 것이 좋다. 막연한 친목 모임보다 공부 모임이나 봉사 활동이 바람직하다.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50+인생학교'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 [사진 50플러스재단]

은퇴 후에는 일로 만들어진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모임을 만드는 것이 좋다. 막연한 친목 모임보다 공부 모임이나 봉사 활동이 바람직하다.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50+인생학교'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 [사진 50플러스재단]

대학을 졸업하고 금융회사에 입사해 신입사원 연수를 받을 때다. 직장 선배 한 사람이 강의를 마치고 이런 얘기를 했다. “여러분이 직장생활을 하며 배울 건 별로 없다. 다만 사람은 많이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인간관계가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의 자산이 될 수 있다.” 모두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배울 게 없다는 얘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연수를 마치고 현업에 배치됐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선배의 말에 공감이 갔다. 금융업무시스템이 단순해서 크게 배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금융거래를 통해 정말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고객관리를 위해 명함의 인적사항을 대학노트에 적어 놓았는데, 이런 노트가 몇 권이나 된다.

희미해지는 은퇴 전 인간관계

흔히 사람들은 사회에서 맺은 인간관계가 지속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은퇴하면 이해를 바탕으로 한 관계는 모래성과 같아서 만남의 기회가 옅어지며 희미해지고 종국에는 끊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동네에 마땅히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은퇴자가 눈을 돌리는 것이 그동안 뜸했던 동창회다.

동창들은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고, 그들 또한 얘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해 처음에는 잘 어울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가치관이나 관심사가 다름을 알게 되고 어떤 때는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다툴 때도 있다. 지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똑같은 얘기가 반복되면 그만 만남 자체에 회의가 든다. 결국 동창회에 나가는 빈도가 점차 줄어든다.

처음부터 관계에 스스로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있다. 역대 직업외교관 중 최장수 대사 기록을 지니고 있는 K 씨는 은퇴한 다음 날 수십 년간 만난 사람들 전화번호를 전부 지웠다. 은퇴 전까지 알던 사람 중 99%는 만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집에서 책 쓰는 일만 한다. 이렇게 혼자 지내는 이유는 할 일이 많은데 여러 사람을 만나면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사회생활을 접은 것이다.

2005년 길상사에서 법문하는 법정 스님의 모습. 법정 스님은 관계에 거리를 두고, 혼자서 지내며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셨다. 길상사에서 법회를 마친 후 항상 오대산 암자로 향하셨다고 한다. [중앙포토]

2005년 길상사에서 법문하는 법정 스님의 모습. 법정 스님은 관계에 거리를 두고, 혼자서 지내며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셨다. 길상사에서 법회를 마친 후 항상 오대산 암자로 향하셨다고 한다. [중앙포토]

법정 스님도 그런 분이다. 스님은 생전 본인이 창건한 길상사에서 법회를 가졌지만 끝나면 어김없이 오대산 암자로 향했다. 주위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스님은 단 하루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왜 오랜 기간을 혼자 있으려고 했을까. 산중에서 얼마나 외로워했을까. 그러나 그건 범인의 생각이고 스님은 오히려 혼자 글을 쓰는 게 편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드니 주변을 정리하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사후에 남에게 자신의 짐을 정리하게 하는 것도 폐를 끼치는 일이다. 지난날의 추억이 담겨있는 사진이나 물건이 본인에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남에게는 그저 짐일 뿐이다. 임종하는 날을 미리 알 수 있으면 그때 가서 해도 되겠지만, 그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므로 틈틈이 정리해두는 것이 좋다.

공부나 봉사 모임으로 관계 재정립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은퇴 후 만나는 사람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자칫 몸과 마음을 상하기 쉽다.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제한적이다. 그래서 관계도 정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까.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다만 막연한 친목 모임보다 관심사가 같은 공부 모임이나 구체적 목적이 있는 봉사모임을 권하고 싶다. 또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가 아니면 그와의 시간을 좀 더 갖고 싶은가를 기준의 하나로 삼을 수도 있다. 전자의 사람과는 거리를 두고 후자의 사람과는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각자의 기준이 만들어지면 다른 사람이 나의 영역에 넘어오지 않도록 펜스를 쳐야 한다. 이 말은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이렇게 관계가 정리되면 그때부터 남은 시간은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쓴다. K 씨처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은퇴 후에는 이처럼 여러 면에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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