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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대신 지낸 ‘한국인 혈통’ 도고 시게노리를 찾아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2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을 읽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고민하다가, 심수관가와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위치한 가고시마현에 여행 가기로 했다. 사진은 도고 시게노리 동상. 오른쪽 앞에 세워진 비석은 지금은 고인이 된 오부치(小渕) 전 총리가 외무대신 시절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세운 것이다. 오부치 씨가 쓴 글씨이다. [사진 양은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을 읽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고민하다가, 심수관가와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위치한 가고시마현에 여행 가기로 했다. 사진은 도고 시게노리 동상. 오른쪽 앞에 세워진 비석은 지금은 고인이 된 오부치(小渕) 전 총리가 외무대신 시절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세운 것이다. 오부치 씨가 쓴 글씨이다. [사진 양은심]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47개로 나누어지는 일본 전국의 땅을 밟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한국도 돌아보지 못했는데'라는 생각에 철회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찾아다닐 이유가 생겼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到来人)’이라 불렸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전쟁에 희생되어 끌려 오거나 나라를 잃고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도래인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권을 샀다. 『일본편 1 규슈/빛은 한반도로부터』에는 서로 교류하며 사이좋게 지냈던 과거의 한반도와 일본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사이 좋았었네!"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가슴이 뛰었다.

과거엔 사이좋았던 한국과 일본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나의 소망은 한국과 일본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내 아들들이 일본인이기에 더 절실한지도 모르겠다. "나의 반은 한국인이야."라고 자각하고 있는 큰아들의 말을 들으며 진정으로 내 아이와 한국 아이들이 싸우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어쩌면 한국과 일본이 싸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그렇다.

친구들과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때 가고시마현(鹿児島県)이 후보에 올랐다. 순간 '심수관(沈壽官)가'와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기념관'이 떠올랐다.
"아! 가고시마에서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그럼 그러자."

지난 6월 2일부터 4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가고시마현을 찾았다. 나에게 있어서는 도래인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는 첫 여행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도 가방에 넣었다. 일본인 2명과 한국인인 나, 이렇게 3명이 하네다 공항을 출발했다. 친구들 말에 의하면 가고시마는 일본인들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라고 한다. 전국을 여행하고 다닌 친구도 가고시마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 입구(위)와 전경(아래) 모습. 기념관 입구는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간판이 없었다면 오래된 주택 정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입구와 다른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계양대가 없었으면 가정집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왼쪽에는 도고 시게노리의 선조가 도자기를 구웠던 옛 가마터가 있다. [사진 양은심]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 입구(위)와 전경(아래) 모습. 기념관 입구는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간판이 없었다면 오래된 주택 정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입구와 다른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계양대가 없었으면 가정집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왼쪽에는 도고 시게노리의 선조가 도자기를 구웠던 옛 가마터가 있다. [사진 양은심]

주차장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먼저 가게 된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기념관’은 동네 공민관 옆에 세워진 건물로 아담했다. 언뜻 보기에 깔끔하게 지어진 외관이다. 정원에서 일하던 직원이 입장료를 내야 한다며 "안을 보시겠습니까?"라고 미안한 듯이 물어온다. "물론입니다."

200엔. 내가 가자고 해서 간 곳이기에 내가 친구들 티켓까지 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관내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공기 순환이 안 된 듯한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들어서자마자 외무대신 시절 의복이 보이고 ‘도고 시게노리’의 선조에 대한 설명과 그의 일생을 설명하는 패널이 있었다. 일본어, 한글, 영어. ‘한글’이 특별해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감정이리라. 일본인 친구는 ‘관광지니까’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본에서 한글 표식이나 안내문을 보는 것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외무대신 시절의 의복이 보인다. 그 옆에는 초상화가 걸려있다. 조선인 출신의 그가 외무대신까지 올라갔다니.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태평양전쟁을 끝까지 반대해, 결국 전쟁을 종결시킨 일등공신이라는 점이다. [사진 양은심]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외무대신 시절의 의복이 보인다. 그 옆에는 초상화가 걸려있다. 조선인 출신의 그가 외무대신까지 올라갔다니.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태평양전쟁을 끝까지 반대해, 결국 전쟁을 종결시킨 일등공신이라는 점이다. [사진 양은심]

생전에 썼던 편지와 기록물들, 도공이었던 선조들의 역사도 소개되고 있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가까이서, 멀리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좁은 전시실이었지만 시간이 걸렸다. 같이 간 친구들의 존재까지 잊고 빠져들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그의 조상은 400여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라는 무사에게 끌려 온 도공 박평의(朴平意)이다.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박평의의 13대손으로 태어났다. ‘도고(東郷)’라는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86년 그의 아버지이자 박평의의 12대손인 박수승(朴壽勝)이 '도고'라는 일본의 성을 사서 개명한 후부터다. 개명할 당시 5살이었던 조선 도공의 후예가 일본의 외무대신에까지 올라간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요즘엔 귀화 1세대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태평양 전쟁 종결 호소한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평화주의자였다고 한다. 1941년 외무대신 요청을 수락한 것도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 군부와 대립해 외무대신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도 했으나, 내각이 바뀌고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외무대신으로 복귀한다. 천황이 참석하는 어전회의에서 전쟁 종결을 호소했고 천황이 '외무대신의 의견에 찬성한다'라는 말로 태평양전쟁은 종결된다.

1946년 A급 전범으로 지명돼 재판을 받고 금고 20년 판결을 받았다. 복역 중 건강이 악화해 1950년 7월, 67년의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돼 있다. 끝까지 전쟁을 반대했던 인물. 그가 평화주의자였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위안을 주었다.

일본 친구들은 전쟁을 종결시킨 외무대신이 조선의 후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도 나와는 달리 담담했을 것이다. 기념관이 있는 미야마(美山)에는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이어 온 가마가 십여 개 남아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가마가 ‘심수관가’다. 우리 셋은 심수관가로 발길을 돌렸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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