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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북한인권백서 실종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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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북한 주민이 한국 영상물에 빠져든 건 전력난 때문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어느 강연에서 한 말이다. TV 보기가 힘들어 배터리로 작동하는 ‘알판(CD·DVD)’ 플레이어가 퍼졌고, 이어 중국을 통해 알판에 담긴 한국 드라마·영화가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설명이다. 시초는 10여 년 전이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드라마 ‘도깨비’ ‘해를 품은 달’ ‘태양의 후예’ 등이 북한에서 유행했다. ‘강남 스타일’을 개사한 ‘오빤 청진 스타일’ 같은 ‘남조선 날라리풍’ 음악도 북한 사회를 파고들었다.

한국 드라마를 접하면 이내 빠져든다고 한다. 이런 탈북자 인터뷰를 담은 보고서가 있다. “북한 드라마에서 좋은 사람은 잘생겼고 간첩은 못생겼다. 보자마자 누가 간첩인지 안다.” “북한 드라마는 시작하면 어떻게 끝날지 뻔히 보인다. 남한 드라마는 예측할 수 없다. 궁금해서 자꾸 본다.”

북한 주민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남한은 저렇게 사는구나”라고 느낀다. 북한에서 한국 영상물을 강력히 단속하는 이유다. 걸리면 무마하는 데 “한국 영화는 5000위안(약 85만원), 미국 영화는 2000위안”이라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돈으로 해결하는 건 예전이었던 것 같다. 그제 일본 언론들은 “한국 영상물을 유통하다 사형당하는 것을 봤다”는 탈북자들 인터뷰를 보도했다. 근거는 통일연구원이 펴낸 ‘북한인권백서 2019’다. 그런데 정작 백서는 종적을 감췄다. 이달 초 통일연구원이 웹사이트에 올렸다가 내렸다. “교정이 끝나지 않았는데 실무자가 실수로 올렸다”는 해명이다. 그러고서 2주일 가까이 감감무소식이다. 왠지 해명이 궁색하다. 북한은 드라마를 통해 남한의 실상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한은 보고서를 통해 북한의 실상이 공개되는 것을 겁내는 것 같다. 이상한 현실이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