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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정신으로 이은 전통...소치 허련 5대손의 현대 한국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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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 '유목동물+인간-문명 2018-2'( 162x130cm,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 사진 통인화랑]

허진, '유목동물+인간-문명 2018-2'( 162x130cm,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 사진 통인화랑]

 마치 어떤 우주의 풍경을 그린 듯하다. 빛의 파편들이 흩뿌려진 듯한 눈부신 화폭 안에서 동물과 인간이 어우러진 풍경. 큰 동물 형상에 인간의 형상이 마치 작은 퍼즐 조각들처럼 겹쳐져 있다. 마치 작가는 처음부터 이렇게 그리기로 작정하고 그린 듯하다. '동물은 크게, 인간은 작게'.

한지에 강렬한 채색으로 풀어놓은 상생(相生)의 꿈 #허진 작가, 통인화랑서 '기억의 다중적 해석' 전시 #환경친화적 생태론을 채색화로 형상화

 서울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허진(57·전남대 교수)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작가가 최근 구상하고 작업해온 '유목동물+인간-문명'연작과 '이종유합동물+유토피아'연작을 선보이는 자리다. "인간은 자연 앞에 초라한 동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작가는 "자연과 인간, 문명이 더불어 살면 좋겠다는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고 말했다. '

기억과 역사의 해석

'기억의 다중적 해석'이란 전시 제목이 말하듯이, 그가 화폭에 풀어놓은 것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작가 개인의 기억이자, 이 땅의 기억이고, '지구'라는 이 행성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유목동물과 인간을 자신의 화폭에 자유롭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작가는 자연과의 상생(相生)과 조화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표현했다.

'유목동물+인간-문명2016-28(동학혁명이야기),146x112cm,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사진 통인화랑]

'유목동물+인간-문명2016-28(동학혁명이야기),146x112cm,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사진 통인화랑]

 "기억의 축적이 곧 역사"라고 말하는 작가는 올해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동학농민혁명 등 한반도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담아낸 작품도 함께 선보였다.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 연작은 좀 더 일상적인 풍경을 담아냈다. 최효찬 작가의 에세이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2018, 멘토프레스)을 위해 그렸던 작품으로, 작가의 추억과 현재의 삶이 혼재하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한국화, 실험은 계속된다   

허진,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 1' (45x53cm, 한지에 수묵 및 아크릴 채색). ([사진 통인화랑]

허진,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 1' (45x53cm, 한지에 수묵 및 아크릴 채색). ([사진 통인화랑]

 허진,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 5' (45x53cm, 한지에 수묵 및 아크릴 채색). ([사진 통인화랑]

허진,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 5' (45x53cm, 한지에 수묵 및 아크릴 채색). ([사진 통인화랑]

허진 작가는 오래전부터 한국화의 새로운 표현방식과 주제의식을 탐구해왔다. 한지에 먹을 쓰되 전통 분채(가루 물감)을 이용한 채색과 아크릴 채색을 과감하게 곁들인다. 눈부실 만큼 밝은 색채는 작가가 자유롭게 표현한 동물과 인간이 어울린 풍경을 더욱 몽환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허 작가는 과거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흔히 동양화의 특색을 말할 때 먹이나 여백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수묵화만 알고 채색화는 몰라서 하는 얘기"라고 말한 바 있다. "내가 그리는 채색화도 동양화의 전통 맥락에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의 변화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전통은 죽은 것"이라며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상철 동덕여대 교수는 "허진 작가는 이전에 '익명인간'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연작을 통해 치열한 역사 인식을 보여줬다"며 "그의 회화 바탕엔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미덕으로 삼는 동양 전통회화의 서정성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허 작가는 최근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의미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며 "현대 과학 문명에 대한 성찰을 거쳐 작가는 최근 연작에서 동양적 '유토피아'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묵화의 전통을 일부 받아들이되, 여기에 인간에 대한 탐구, 시대에 대한 통찰을 곁들여 역동적인 표현기법으로 현대 한국화에 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소치 허련의 후예 

 허 작가가 독창적인 실험으로 현대 한국화를 실험하고 있는 데에는 그의 독특한 개인사와도 관계있다. 그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수제자이자 호남 남종화의 시조인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1893)의 고조손이며 근대 남화의 대가인 남농(南農) 허건(許鍊·1907~1987)의 장손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학·석사)하고 창작 활동을 해오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2002년부터 전남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남 진도에 자리 잡은 소치의 운림산방의 화맥을 5대째 이으며 한국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수묵화의 특징인 함축미를 벗어나 채색화 성격이 강한 표현방식으로 서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30일까지(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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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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