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총장 윤석열’에 대한 소수의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어제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을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했다. 발표 후 윤 지검장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지켰다. ‘총장 윤석열’에 거는 기대와 우려를 반영한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소수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중앙지검장 → 총장’ 깨겠다 해놓고 #2년 만에 ‘고검장 안 거친 파격’? #원칙은 어려울 때 지켜야 빛난다

윤석열 지검장이 문무일 총장보다 다섯 기수 아래란 점 때문이 아니다. 그가 총장이 되면 사법연수원 선배나 동기인 고검장·지검장 수십 명이 사퇴할 거라고 한다. 그렇다고 검찰 조직이나 일선 수사가 흔들리진 않는다.

그가 검찰 조직을 이끌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서도 아니다. 그를 “문재인 사람”(자유한국당) “전형적인 코드 인사”(바른미래당)로 일축하는 건 지나치다. 부러질지언정 자기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다. 윤석열의 말말말은 그가 원칙론자임을 말해준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2013년 10월 국정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 경질 후)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2016년 12월 박영수 특검 수사팀장 임명 후)

소수의견을 다는 이유는 윤석열에게 있지 않다. 현 정부의 원칙에 있다. 2017년 5월 19일 청와대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인사를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장은 2005년 고검장급으로 격상된 이후 정치적 사건 수사에 있어 총장 임명권자의 눈치를 본다는 비판이 계속되어 온 점을 고려하여 종래와 같이 검사장급으로 환원시켰고….”(당시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실제로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 후보군인 고검장급으로 상향 조정된 뒤 ‘총장이 되려고 대통령 눈치를 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중앙지검장이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총장 인사를 하겠다.” 과거 정부에서 공공연하게 나돌던 얘기다. 2013년 대검 중수부가 폐지되고 서울중앙지검이 ‘슈퍼 검찰청’이 되면서 우려는 몇 배 더 커졌다.

문재인 정부가 ‘서울중앙지검장→총장 직행’ 구조를 깨겠다고 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었다. 그게 불과 2년 전이었다. 이번 인사로, 윤석열을 위해 중앙지검장을 검사장급으로 하향 조정한 후 다시 그를 총장으로 올린 셈이 된다. ‘고검장을 거치지 않은 파격 인사’라는 언론 보도가 틀린 건 아니지만 지난 2년간의 과정이 빠져 있다.

지금 그를 지명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제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검찰개혁과 조직 쇄신, 부정부패·비리 척결에 대한 확고한 수사 의지”를 꼽았다. 윤석열은 상징성도 있고, 리더십도 있다. 무엇보다 수사권 조정 문제로 검찰 내부 반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조직을 다잡을 사람이 필요했으리라. 윤석열이 검찰을 얼마나 힘 있게 이끌어갈지, 조직 안팎의 인식차를 어떻게 좁혀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원칙을 허무는 건 위험하다. 윤석열은 중앙지검장으로 ‘사법농단’ 사건과 이명박 전 대통령 사건 같은 대형 수사를 지휘해왔다. 이번 인사는 자칫 다음 중앙지검장을 비롯한 검찰 간부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윤석열이 총장 되는 것과 총장 직행 코스를 없애는 것 중 어느 쪽이 중요할까. 나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위해 직행 코스 단절이 더 중요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쉽다. 원칙론자를 원칙에 맞게 쓸 수는 없었을까.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평론가 신형철은 ‘폭력’을 이처럼 정의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나는 신형철의 언어에 공감하면서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섬세해질수록 진실에 가까워지고, 스스로에게 엄밀해질수록 개혁은 완전해진다.

“절박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큰 정의를 위해 작은 정의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건 이런 말들을 이겨낼 때다. 원칙은 어렵고 절박할 때 지켜야 빛이 난다. 내가 문재인 정부에 품었던 기대는 그런 원칙에 관한 것이었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