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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감독 정정용의 반란 “끝까지 함 가보입시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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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정정용 감독은 국가대표 경력도 없는 비주류지만, 지도자로서 반전에 성공했다. [연합뉴스]

정정용 감독은 국가대표 경력도 없는 비주류지만, 지도자로서 반전에 성공했다. [연합뉴스]

#장면1. 한국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이 에콰도르에 1-0으로 승리하며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결승에 진출한 직후. 한국 벤치 뒤쪽으로 몰려든 팬들은 선수들과 한목소리로 “정정용, 정정용”을 연호했다. 이를 들은 정정용(50) U-20 대표팀 감독이 익살스러운 동작을 취하며 선수들 쪽으로 달려갔다. 선수들과 정 감독은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승리를 자축했다. 정 감독은 물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그라운드 인터뷰에 응했다.

U-20 축구대표팀 결승 이끈 지도자 #주전·비주전 차별 없이 대하지만 #이강인도 조기 교체, 전술엔 집요 #부상으로 28세에 일찍 선수 은퇴 #현 팀원들과 유소년 때부터 호흡

#장면2. 준결승전 직후 공식 기자회견 때 “에이스 이강인(18·발렌시아)을 후반 28분에 일찍 교체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정정용 감독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 순간은 추가골 찬스를 노리기보다 지키는 축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비 지역에서) 좀 더 열심히 뛰어줄 선수가 필요했다. 전술적으로 (선수 교체를)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실업축구 무대에서 뛰던 ‘무명 선수’ 출신 지도자 정정용 감독이 한국 축구 역사를 다시 썼다. 12일 폴란드 루블린에서 열린 U-20 월드컵 4강전 에콰도르전에서 1-0 승리를 이끌며 한국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한국 남자축구가 FIFA 주관 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향후 국제무대에서 한국 대표팀의 슬로건을 ‘AGAIN 2019’로 바꿔놓는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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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주목받지 못했던 정 감독이 지도자로서 성공스토리를 쓸 수 있었던 비결은 ‘냉정과 열정의 조화’다. 훈련·전술·선수 구성·체력 관리 등 승리 가능성을 1%라도 높일 수 있는 분야에선 누구보다 집요하고 진지했다. 반면 동료와 선수에겐 인간미 넘치는 선배였고 형님이었고 스승이었다.

정정용 감독은 1992년 실업축구 이랜드 푸마에 창단멤버로 참여했다. 수비수로 6시즌을 뛴 뒤, 1997년 부상으로 28살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 이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에서 스포츠 생리학을 공부했다. 부상 후 체계적인 재활을 하지 못해 일찍 선수를 그만둔 자신의 전철을 후배들이 밟지 않도 록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이어 ‘유망주 육성’을 목표로 설정하고 매진했다. 이처럼 특화된 목표는 축구계에서 일찌감치 ‘유소년 육성 전문가’로 자리매김하는 배경이 됐다.

2006년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로 출발해 줄곧 연령별 청소년 대표팀을 가르쳤다. 2014년 고향 팀인 프로축구 대구FC 수석코치 시절에도 산하 유스팀인 현풍고 감독을 겸임했다. 이번 대회에서 활약한 조영욱(20·서울), 오세훈(20·아산), 엄원상(20·광주) 이 유소년 시절부터 정 감독이 성장 과정을 지켜봤던 선수들이다. 선수들에 대한 오랜 관찰은 정정용 호가 이번 대회 경기마다 서로 다른 포메이션과 선수 구성으로 ‘팔색조 전술’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다. 선수들의 장단점을 정밀하게 파악해, 상대와 상황에 맞춰 최적화 한 전술을 가동했다.

경기에 관해선 데이터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판단하는 정정용 감독이 선수들과 관계에 있어선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 진심에서 비롯한 소통이 그 열쇠다. 주전이냐, 비주전이냐에 따른 편애 없이 모두를 동등하게 대한다. ‘미리 정한 규율을 지킨다’는 약속을 토대로 선수들을 철저히 믿는다. 정 감독은 이번 대회 기간 선수단에 ‘스마트폰 사용 금지’나 ‘소셜 미디어 금지’ 등의 제약을 두지 않았다. 다만 ‘함께 식사할 때는 스마트폰 쓰지 않기’라는 규칙 하나만 정했다. 정 감독은 “선수들이 자신이 언급된 기사를 검색하거나 소셜미디어를 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들로부터 스마트폰을 뺏는 건 말이 안 된다”며 “그저 ‘과도한 사용을 자제하라’라거나 ‘시간이 나면 책을 좀 더 읽어보라’고 권하는 정도다. 선수 자신에게 결정을 맡겼다”고 말했다.

정정용 감독은 기자회견을 끝낸 뒤, 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함 가보입시더. 이젠 우짜든우승해야지예”라며 씽긋 웃어 보였다. 선수들에게 늘 ‘원팀(one team)’을 강조하던 정 감독에게 미디어도 ‘원팀’의 협력 파트너였다.

루블린(폴란드)=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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