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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만 7000만 개… AI가 블렌딩한 위스키의 맛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23)

증류, 숙성, 블렌딩은 위스키 제조 과정의 핵심이다. 구리로 된 오래된 증류기는 증류소의 자랑이고, 시간을 담는 숙성창고는 증류소의 보물이다. 여러 위스키를 조합해 최고의 맛을 끌어내는 블렌딩은 인간의 예술작품 중 하나로도 불린다. 하지만 각종 과학의 발달이 위스키 제조 과정을 완전히 뒤바꾸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AI가 위스키를 블렌딩 한다

올가을 출시 예정인 맥마이라 증류소의 세계 최초 AI 위스키. [사진 맥마이라 인스타그램]

올가을 출시 예정인 맥마이라 증류소의 세계 최초 AI 위스키. [사진 맥마이라 인스타그램]

스웨덴 '맥마이라(MACKMYRA)' 증류소는 이번 가을, 인공지능(AI)이 블렌딩한 위스키를 세계 최초로 발매한다고 지난 5월 12일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핀란드의 인공지능 컨설팅 기업, 포카인드(Fourkind)가 함께 했다. AI는 위스키 플레이버와 소비자 선호도, 그리고 판매 데이터 등의 정보를 분석해, 약 7,000만 개 이상의 위스키 샘플을 만들어냈다.

맥마이라 측에 따르면, 첫 AI 위스키는 토피, 크림 바닐라, 고급 올로로소 쉐리, 시트러스, 서양배, 사과, 진저, 백후추, 오크통 등의 향을 가지고 있다. 맛은 오크통 바닐라, 감귤류와 서양배, 허브에 약간의 담뱃잎. 그리고 프루티하면서 약간의 소금기가 느껴지는 드라이한 감촉의 위스키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설명만 봐선 맛있는 위스키의 맛과 향을 모두 가지고 있다.

AI는 인간이 해온 ‘위스키 블렌딩의 예술’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맥마이라 증류소에서 위스키 맛을 담당하는 Angela D'Orazio 씨는 “7,000만 개의 위스키 레시피를 고안한 것은 AI지만, 어떤 레시피로 할지 선택한 것은 인간”이라며, “아직 인간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분자요리’란 게 있다. 음식을 분자 단위까지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으로, 음식 재료나 요리 방법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새로운 스타일의 음식을 창조해낸다. 이 ‘분자’의 개념을 위스키에 적용한 게 바로 ‘분자 위스키’다.

세계 최초 분자 위스키 '글리프(GLYPH)'. [사진 박진영]

세계 최초 분자 위스키 '글리프(GLYPH)'. [사진 박진영]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스타트업 회사, ‘엔들리스 웨스트(Endless West)’. 이 회사는 2018년에 ‘글리프(Glyph)’라는 이름의 분자위스키를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고급 위스키가 가진 분자의 타입과 비율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필요한 화합물을 천연재료로부터 추출해 위스키에 혼합했다. 이 방법으로 긴 숙성기간이 필요했던 고급 위스키를 약 24시간 만에 만들어냈다고 한다. 가격은 35~50달러.

아쉽게도 분자 위스키의 맛은 위스키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글리프를 마셔본 위스키 마니아 박진영 씨는 “한 마디로 싱거웠다. 하이볼이나 칵테일용으로는 좋을 거 같은데, 위스키가 가진 깊은 맛을 내기엔 아직 부족해 보였다”고 말했다. 여의도 CS Bar의 김창수 바텐더도 “너무 가짜 향을 만들어내는 데 치중했던 것 같다. 향만으로도 어설프다는 걸 금방 알아챌 정도”라고 비평했다.

지만 엔들리스 웨스트 사는 “공급 부족의 위스키 시장 판도를 바꾸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또 이탈리아 모스카토 와인 등을 분석해, ‘분자와인’의 영역에도 도전할 예정이다.

증류기의 스마트화, 'iStill'

아이폰이 핸드폰의 혁명을 불러왔다면, 네덜란드 기업이 만든 '아이스틸(iStill)'은 위스키 생산의 혁명을 만들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증류를 할 수 있게 증류기를 소형화했다. 약 50종류의 스피릿 샘플 중에서 원하는 걸 선택하면, 크기에 따라 1시간에 20~200ℓ의 스피릿을 생산한다.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아이스틸(iStill)'. [사진 아이스틸 홈페이지]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아이스틸(iStill)'. [사진 아이스틸 홈페이지]

인터넷이 가능한 곳 어디서든 앱을 통해 원격으로 조작할 수도 있다. 스테인리스로 만들어, 구리로 된 기존 증류기의 유지·관리의 어려움도 개선했다. 또 직화 방식을 도입해 증류기 가열에 필요한 연료비를 대폭 줄였다.

현재 아이스틸은 위스키, 럼, 보드카 등을 만드는 전 세계 500곳 이상의 증류주 제조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아이스틸 제조회사는 증류주 생산을 책임지는 ‘마스터 디스틸러’가 되기 위한 코스를 운영 중인데, 코스 과정이 단 4일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마스터 디스틸러가 되기 위해 수년이 걸리는 것과 비교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만일, 아이스틸이 전자레인지 크기 정도로 작아져 가정에 보급된다면, 누구나 마스터 디스틸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발효주는 자연이 만들었고, 위스키를 비롯한 증류주는 인간의 증류기술이 만들었다. 위스키가 과학기술과 만나는 건, 어쩌면 인간이 만든 술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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