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우리 기업을 벌판에 내버려두지 마라

중앙일보

입력 2019.06.11 00:12

업데이트 2019.06.1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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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상렬 경제 에디터

이상렬 경제 에디터

우리 기업들에 선택의 순간이 예상보다 빨리 왔다. 기업들은 미국이냐 중국이냐, 화웨이냐 반(反)화웨이냐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중의 기업 압박 거세지는데
정부는 방관하는 모습 일관
기업 지킨다는 믿음 심어줘야

기업들은 2년 전 ‘사드(THAAD) 사태’ 때의 롯데를 떠올릴 것이다. 경북 성주의 골프장을 사드 부지로 내놓은 것은 정부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곧 중국의 보복이 시작됐다. 롯데마트는 중국 현지의 불매운동에 시달렸고, 중국 내 점포 99개 중 87곳이 당국의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돌아보면 2000년대 후반 롯데마트의 기세는 대단했다. 중국에 500개의 점포를 깔아 중국 유통을 제패하겠다는 꿈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중국의 사드 보복 이후 그 꿈은 물거품이 됐다. 롯데마트는 점포들을 중국 업체에 매각하고 철수했다. 대륙에 유통제국을 세우겠다며 진출한 지 11년 만이었다. 사드 보복으로 인해 롯데가 입은 금전적 피해는 대략 2조원 정도로 꼽힌다. 롯데의 이미지 손상은 아예 측정 불가다.

이번에도 중국은 보복 의사를 숨기지 않고 있다. 중국 상무부는 외국 기업 블랙리스트 작성에 들어갔다. 거기엔 ‘중국 기업에 대해 공급을 중단하거나 봉쇄하며 배타적인 조치를 취하는 행위’와 ‘중국 기업과 관련 산업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 등이 포함됐다. 화웨이 등에 대한 부품 공급 중단, 화웨이 장비 사용 금지 등이 보복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중국 당국은 최근 글로벌 IT업체 12곳을 불러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중국 거래 금지 조치에 협조하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했다. 이 사실은 뉴욕타임스(NYT) 보도로 알려졌다. 여기엔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미국 업체뿐 아니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포함됐다. 보복도 보복이지만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은 국내 IT업체에 상당한 내상을 입힐 것이다. 삼성·SK하이닉스와 화웨이는 이미 공급망(supply chain)에서 서로 얽히고설켜있다. 삼성의 낸드플래시 공장과 SK하이닉스의 D램 반도체 공장이 중국 땅에서 돌아가고 있다. 화웨이가 수입하는 한국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은 연간 12조원이 넘는다.

서소문 포럼 6/11

서소문 포럼 6/11

그렇다고 중국 편을 들기도 쉽지 않다. 이미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 IT 기업인들 앞에서 5G 네트워크와 관련해 “신뢰받는 공급자를 선택해야 한다”며 반화웨이 전선 동참을 촉구했다. 경영 간섭에 가까운 미국 대사의 이례적인 주문에 기업인들이 느낀 압박감은 컸을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은 점잔을 빼고 뒤로 앉아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기업들은 지난해 봄 중국 IT업체 ZTE가 미국의 제재로 초토화되는 것을 지켜봤다. 트럼프 정부는 ZTE가 미국의 대이란 및 대북제재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반도체 등 부품 공급을 금지했고, ZTE의 영업은 뿌리째 흔들렸다. 이 제재는 ZTE가 벌금 10억 달러를 내고 경영진을 교체하고야 풀렸다.

우리 기업들로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앞에는 사자가, 뒤에는 호랑이가 있는 형국이다. 선택을 강요받기로 치자면 세계 곳곳의 글로벌 기업들이 마찬가지다. 한 가지 특징은 기업과 정부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구글, 인텔, 퀄컴 등 미국 업체들이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을 선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미국 상무부가 화웨이와 68개 계열사를 거래제한 기업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와 일전을 치르고 있는 화웨이 뒤에는 중국 정부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 각국 정부는 미국과 중국의 결투 속에 궁지로 내몰리는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벌판에 외로이 내버려진 것 같다. 청와대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될 부분들이 있다”고 선을 그었고, 국무총리가 지시한 미·중 전략 경쟁 전담조직은 아직 가동되지 않고 있다. 기업들은 누구를 믿고 어디에 기대야 하는가.

사드 사태 때 기업인들은 정부가 기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재계 인사들은 “롯데는 정부 말을 따른 것밖에 없는데…”라고 안타까워했다. 그 기억은 지금껏 남아 있다. 기업들은 이번에 중국 당국에 불려가 협박을 받고도 주중 한국 대사관에 알리지 않았다. ‘롯데 학습 효과’가 남긴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모른다.

지금 정부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쉽고도 단순한 것이다. 국제 정세가 아무리 거칠어도 최선을 다해 우리 기업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 말이다.

이상렬 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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