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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 속 화장품 방판소녀단···아모레 1조 매출 비밀병기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삼삼오오 모여 화장품 박스를 가운데에 두고 발라보면서 담소 나누는 동네 어머님들. 화장품 방문판매(방판) 사원, 이른바 ‘아모레 아줌마’(현재 공식명칭은 카운셀러)를 떠올렸을 때의 이미지다.

연간 1조원 매출 올리면서 '건재' #방판 3만여명이 고객 250만 관리 #시간 없는 고객에 '맞춤 서비스' #10년 차 방판 고수의 원칙은 #"물건 팔 생각부터 하지 말 것"

90년대생인 기자에게 ‘방판’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본 게 전부다. 1964년 등장한 아모레퍼시픽의 방판사원은 지금도 전국에서 3만여명이 활동 중이다. 방판으로 화장품을 사는 소비자는 무려 250여만명. 매출은 1조7000억원(2016년 기준)이나 된다. 21세기 ‘방판 소녀단’이 누비는 현장을 직접 따라가 봤다.

2016년 종영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극중에서 쌍문동 여사들이 집으로 방문한 화장품 방판 서비스를 이용하는 모습.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캡쳐]

2016년 종영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극중에서 쌍문동 여사들이 집으로 방문한 화장품 방판 서비스를 이용하는 모습.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캡쳐]

고수의 조수석엔 '구두 다섯 켤레' 

지난 3일 경기 부천시의 아모레 방문판매 지점. 방문판매 10년차 베테랑 카운셀러 심순애(58)씨는 오전 10시에 지점을 찾았다. 심순애씨의 하루는 오전 8시에 시작해 오후 6시에 마무리된다. 오전 신상품 등에 대한 교육을 듣고 자신이 정해둔 구역에 나가 본격적인 판매에 돌입한다.

처음 방판을 시작하는 카운셀러는 무료 샘플을 회사에서 사다 무작정 돌리면서 고객을 확보한다. 하지만 10년 차인 심씨는 이미 ‘단골’ 고객이 많아 하루에 3곳씩 돌아다니며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날 심씨는 화장품 판매보다 고객관리에 집중했다.

경기도 부천 아모레퍼시픽 비즈니스 센터에서 심순애(56·오른쪽)씨가 고객과 화장품을 테스트하고 있다.[사진 아모레퍼시픽]

경기도 부천 아모레퍼시픽 비즈니스 센터에서 심순애(56·오른쪽)씨가 고객과 화장품을 테스트하고 있다.[사진 아모레퍼시픽]

부천지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카운셀러들을 뒤로하고 샘플과 화장품이 가득 찬 가방을 들고 심씨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처음엔 무거운 샘플 가방을 들고 걸어 다니며 고생도 많이했다. 5년 전엔 왼쪽 무릎 연골이 찢어지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요즘엔 딸이 준 자동차로 운전을 하며 돌아다닌다. 내비게이션에는 딸이 대신 입력해준 그의 ‘VIP고객’ 주소지가 빼곡했다.

심씨의 자동차 조수석에는 화려한 구두 다섯 켤레가 놓여있다. 구두가 왜 이렇게 많냐는 질문에 심씨는 “지금 찾아가는 고객이 신발가게를 하는데 그곳에서 산 것”이라고 말했다. 심씨에게 옷과 구두는 전쟁터로 향하는 장군의 갑옷과 칼이나 다름없다. 연골을 다쳐 높은 구두를 신기엔 힘이 들지만 여전히 구두를 고집한다. 그는 “나 스스로  ‘인간 헤라·설화수(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브랜드)’라 생각하고 나간다”며 “내가 브랜드인데 아무거나 신고 나갈 수 없지 않냐”고 말했다. 그의 말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심순애(56·왼쪽)씨가 5년 단골인 신발가게 사장님에게 여행용 키트를 전해주고 있다. 최연수기자

심순애(56·왼쪽)씨가 5년 단골인 신발가게 사장님에게 여행용 키트를 전해주고 있다. 최연수기자

첫 영업지인 5년 단골 신발가게에 도착했다. 신발가게 사장님을 ‘언니’라 부르며 시작한 대화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심씨는 여행을 간다는 사장님을 위해 여행 키트 샘플을 따로 챙겨 건넸다. 자매 같은 두 사람이지만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방판이 무엇인지 어서 빨리 보여봐!’라는 기대에 찬 기자의 눈빛 때문이었다.

첫 방문을 마친 심씨는 “원래 단골을 만나면 속 깊은 얘기를 많이 나누는데 다른 사람이 있으니 좀 민망했나 보다”며 웃었다. “우스갯소리로 그 집 수저가 몇 개인지도 알 정도”라고도 했다. 그는 “베테랑 카운셀러는 고객과 만나 제품 이야기를 하기보다 그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며 “대화 도중 고객이 옷을 사고 싶다고 하면 백화점에 함께 가 골라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고객을 대할 때 물건 팔 생각을 먼저 하면 안 돼”
심씨가 내세우는 방문판매 제1원칙이다. 이 원칙을 유지하면서 오래 볼 고객을 한두 명씩 늘려갔다. 돈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10년 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손에 쥔 돈은 월 65만원 남짓이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열 배 넘게 번다. 자녀 학원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 이제는 자랑스러운 커리어가 됐다.

온라인 쇼핑 시대 방문 판매의 역할

통계청에 따르면 상품군별 온라인 쇼핑 화장품 거래액은 2018년 9조 8404억원이다. 전년보다 무려 30.4%나 증가했다. 온라인 쇼핑이 늘어나는 요즘에도 방문판매가 버티는 이유는 찾아가는 서비스와 맞춤형 카운셀링 덕분이다. 쇼핑할 시간을 따로 내기 힘든 틈새 소비층이 이들의 주요 고객이다.

심씨의 10년 단골인 24시간 순댓국집 사장님은 “음식점 장사를 하다 보면 직접 테스트하고 따로 화장품을 사기 힘들다”며 “야간에 일하는 직원도 방문판매를 애용한다”고 말했다. 심씨의 고객 명단에 긴 시간 일하는 여성 고객이 대다수다.

경기 부천시의 24시 순댓국집에서 아모레퍼시픽 상품들을 보여주는 심순애(56)씨의 모습. 최연수 기자

경기 부천시의 24시 순댓국집에서 아모레퍼시픽 상품들을 보여주는 심순애(56)씨의 모습. 최연수 기자

방판소녀단은 변신 중 

신세대 방문 판매자의 등장으로 방문 판매도 변신을 꾀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최연소 방문판매 카운셀러인 정은비(27)씨는 화장품 관련 학과를 졸업해 전문적 지식이 탄탄하다. 맞춤형 제품 추천에도 능하다. 화장품 성분 분석을 해주는 ‘화해’ 애플리케이션과 아모레퍼시픽의 ‘뷰티Q’ 애플리케이션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뷰티Q’는 고객과 상품에 대한 분석 자료도 조회할 수 있어서 전문적인 상담이 가능하다.

방문판매는 업무 시간 설정이 자유롭고 초기자본이 거의 들지 않는다. 고객들에게 나눠줄 샘플 비용만 부담하면 된다. 방판사원은 개인사업자여서 많이 팔수록 많이 벌 수 있다. 방문판매를 시작하기 전 10개의 모바일 수업을 들은 뒤 6개월 안에 3개 과정(입문·육성·정착과정) 교육을 이수하면 카운셀러로 활동할 수 있다. 정씨는 육아와 병행하면서 할 일을 찾다 1년 전 카운셀러 일을 시작했다. 정씨는 “3살 아이가 있어도 카운셀러는 스스로 스케줄을 짜서 다니기 때문에 다른 직업보다 육아에 좀 더 신경 쓸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경기 부천시의 한 24시 순댓국집에서 심순애(가운데)씨가 방문판매하는 모습. 기자(왼쪽)도 자리에 함께해 가장 인기있는 제품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경기 부천시의 한 24시 순댓국집에서 심순애(가운데)씨가 방문판매하는 모습. 기자(왼쪽)도 자리에 함께해 가장 인기있는 제품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고객 관리 형태도 많이 변했다. 10년 전엔 손으로 정리한 고객장부가 재산목록 1호였다. 이제는 고객 관리 애플리케이션으로 기록이 한결 편리해졌다. 심씨도 800명이 넘는 고객을 앱으로 관리한다. 가정 방문은 오래전 사라졌다. 전업주부라 해도 바람도 쐴 겸 카페 같은 데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다. 개인 고객에게 카카오톡으로 행사 알림을 보내고 안부를 묻는다.

심씨는 자영업자 고객이 많아 사업장을 자주 찾는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까지 친해지면 고객은 더욱 확장된다. 심씨는 한 가게당 20명 정도되는 손님을 확보하면서 영업 전선을 넓혔다. 전화번호부 이름은 기억하기 쉽게 ‘○○가게 눈 큰 언니’ ‘△△가게 키 큰 언니’라는 설명이 달려있었다.

심씨는 이제 카운셀러 수석마스터로 활동 중이다. 자식들에게 사회생활 선배로 조언도 마음껏 해줄 수 있게 됐다. 그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여름용 화장품 샘플이 가득 담긴 무거운 짐을 대형 마트 사물함에 보관하기도 했다”며 “에어컨 바람을 쐬며 공짜 정수기 물을 마시는 시간이 휴식의 전부였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심 씨에게 앞으로의 방판 미래가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리 세상이 좋아지더라도 커피 주문할 때도 사람 얼굴을 보며 주문하지 않냐”며 “말이 오가는 소통 그 자체가 곧 방판이라 생각한다”고 웃었다.

최연수 기자 choi.yeonsu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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