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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핏하면 버럭, 나이들면 분노조절 더 안되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정수현의 세상사 바둑 한판(28)  

한 병원 응급실에서 환자가 의료진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폭력적인 언행을 계속하자 보안 직원들이 대응하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 병원 응급실에서 환자가 의료진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폭력적인 언행을 계속하자 보안 직원들이 대응하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언젠가 종합병원에서 목격한 일이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간호사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었다. 사연인 즉,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왜 그렇게 자주 하느냐는 것이었다. 한 번 검사한 것으로 쓰면 될 것을 수시로 피를 뽑아대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 사람은 병원에서 수익을 올리기 위해 꼼수를 쓰는 것으로 보는 것 같았다.

노년이 되면 이 사람처럼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혈기왕성한 젊은 세대에 비해 인생의 연륜이 오래된 만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힘이 높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노년층의 분노조절 능력이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일본에서는 ‘폭주(暴走)노인’이라는 말도 쓰인다. 쉽게 격분하는 노인의 문제를 다룬 후지와라 토모미의 『폭주노인』이 출간돼 일반적인 용어로 쓰이게 됐다. 후지와라는 노인이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원인의 하나로 사회의 정보화에 적응하지 못한 점이 꼽히고 있다. 빠른 기술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노인의 불안이 분노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후지사와(오른쪽)와 조훈현(1984년). 예전에 일본 명인전에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상대방이 반짝이는 금박부채를 사용한 것에 화가 나 분노를 폭발했다. [중앙포토]

후지사와(오른쪽)와 조훈현(1984년). 예전에 일본 명인전에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상대방이 반짝이는 금박부채를 사용한 것에 화가 나 분노를 폭발했다. [중앙포토]

고상한 예도로 인식되는 바둑에서도 분노의 감정이 나타날 때가 있다. 상대방이 매너에 어긋나는 짓을 하거나,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방법을 쓸 때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된다. 이럴 때 바둑돌을 세게 놓아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나도 상대방이 의연하게 두지 않고 쩨쩨하게 둘 때 은근히 화가 난 경험이 있다.

바둑 둘 때 이런 분노는 당연히 바둑 내용에 영향을 끼친다. 예전에 일본 명인전에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상대방이 반짝이는 금박부채를 사용한 것에 화가 나 분노를 바둑판 위에 폭발시켰다. 상대인 린하이펑 9단이 부채를 부칠 때마다 눈이 어른거려 바둑 수를 읽는 데 지장을 받은 것이다.

바둑선 분노가 승리의 자극제되기도

이것을 반외작전, 즉 신경전이라고 본 후지사와는 평소와는 달리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처럼 엄청난 괴력을 발휘해 린하이펑의 대마를 때려으려고 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를 대마 공격에 쏟아부은 것이다. 평소 같으면 상대방의 대마를 적당히 살려주고 이익을 얻는 타협책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결국 그 바둑은 분노의 화신이 된 후지사와가 승리하며 대망의 타이틀을 쟁취했다.

이것은 분노가 승리욕을 자극해 효과를 본 케이스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보통은 분노의 감정으로 바둑을 둘 경우 냉정하게 수읽기를 하지 못한다. 감정이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가 나오기 쉽고 결과적으로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

바둑에서 평정심의 대명사로 통하는 이창호 9단. 그는 소년 시절부터 얼굴에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종택 기자

바둑에서 평정심의 대명사로 통하는 이창호 9단. 그는 소년 시절부터 얼굴에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종택 기자

바둑에서는 마음을 동요를 피하고 ‘평정심(平靜心)’을 유지하라고 권한다. 평정심은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일 때 기사는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

바둑에서 평정심의 대명사로 통하는 인물이 있다. 세계 최강자로 군림했던 이창호 9단이다. 이창호는 소년 시절부터 얼굴에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돌부처’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포커페이스’라는 수식도 따라붙었다. 돌부처처럼 마음의 동요가 없으니 이창호는 항상 바둑의 형세와 상황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특이하다. 이창호의 무표정한 얼굴은 대국하는 상대방에게 묘한 부담을 주었다. 형세를 어떻게 보고 있고, 어떤 작전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안 되기 때문에 이창호의 적은 곤혹스러워했다.

분노 참지 못하면 인간관계 나빠져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화가 날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분노를 바로 표출한다면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주변에서 ‘분노조절 장애’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피하게 되어 인간관계가 나빠질 것이다. 노년기를 안온하게 살아가려면 바둑 고수처럼 시니어도 평정심을 갖도록 하자.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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