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성주의 귀농귀촌이야기(48)
아주 옛날에는 귀농·귀촌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있었다. 우선 성공을 거둔 후 고향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개선하는 금의환향이 있다. 금의환향이란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사자성어다. 대표적인 금의환향은 춘향전에서 과거에 급제해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오는 이몽룡이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벼슬을 얻어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직무를 다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를 낙향 또는 귀향이라고 부른다. 고향으로 리턴하는 것이다. 고려부터 조선 초기에는 관직에 오른 이에게 땅을 하사했다.
그렇기에 관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가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성공한 인물로 존경받고 자자손손이 부를 물려받을 수 있어 매우 환영받는 귀향이었다. 과전법이라 하는데 초기에는 공음전이라 해 땅을 주고 세습할 수 있었다. 후에는 세습이 금지되고 직전법으로 바꿔 땅 대신 녹봉을 지급했다.
퇴계, 귀향 6번 반복
대표적 인물이 퇴계 이황이다. 그는 1534년(중종 29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한 이후 1569년(선조 2년) 69세에 관직을 사양할 때까지 모두 여섯 차례나 입각과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는 물러날 때마다 고향인 퇴계(退溪)로 돌아가겠노라 했다. 퇴계는 그의 집 앞에 흐르는 조그만 개천이자 그의 호이다. 퇴계는 고향으로 돌아가 도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길렀고, 사후에 도산서원이 건립됐다.
조선 시대엔 고향에서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을 성실히 수행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코스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농사일에 전념했으니 귀농·귀촌은 사대부 인생의 당연한 귀결점이다. 그래서 자발적인 귀농·귀촌이 많았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귀농·귀촌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었다. 점차 녹봉을 곡식이나 옷감으로 지급하는 직전법이 자리 잡자 고향으로 돌아가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관직자들이 한양에 눌러 앉는 일이 많았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에 큰 업적을 이룬 학자이자 행정가였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오지로 귀양을 많이 갔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귀농·귀촌을 한 사례다. 귀양살이 중에도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와 같은 좋은 책을 집필해 귀감이 된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도 멀리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그 틈에도 유명한 ‘자산어보’를 집필해 최초의 어류도감을 만들었다. 뜻하지 않은 귀농·귀촌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귀양 중에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을 했다. 그 중 가능하면 지방이 아닌 서울 안이나 주변에서 거주하도록 권한대목이 눈에 띈다. 왜냐하면 중앙에서 벗어나면 관직을 할 기회가 적어지니 늘 눈도장을 찍고 있는 게 좋다는 것이다. 정약용을 실학자 중에 중농파로 구분하지만 귀농·귀촌이란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조선 후기에 실학이 유행하며 당대의 풍조를 바꿔 놓았다.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인데 신분의 서열이 바뀌는 것이다. 농민은 사대부를 이은 두 번째 귀한 존재이고 공방인은 세 번째, 상인은 네 번째라 한다. 실학자 중에는 중농파와 중상파가 있었다.
중상파는 중농파와 달리 상공업을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려 한다. 여러 학자가 농업만으로는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 없고, 기득권인 양반 계층의 무위도식도 깨뜨릴 수 없으니 상공업과 유통을 활성화하자고 주장한다. 물론 농업은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의 혁신으로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이 주장은 지금 농업의 6차 산업화와 일맥을 같이 하니 조상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유형원, 정약용, 이익과 같은 중농파야 말로 농업의 가치를 알고 사회의 개혁을 주문한다. 정약용은 토지를 개인이 소유할 수 없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마을 단위로 공동 농장을 만들어 농민들이 함께 농사짓고, 그곳에서 얻은 것은 일한 만큼 나누어 갖도록 하자’는 방안을 제안한다.
공동농장 주장한 정약용
농업의 헌법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요즘에 비추어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다. 오늘날 토지를 농민이 아닌 자본가가 소유해 직불금마저 빼먹는 모습을 보면 정약용이 뭐라고 호통을 칠지 궁금하다. 농촌사회는 조선 말기에 이어 일제 강점기에도 일제와 친일 부역자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많은 농지가 친일 부역자에게 넘어가고 많은 인력과 곡식이 일제에 수탈당했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어 보면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과 농촌계몽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가벌인 계몽 활동은 ‘브나로드’ 운동을 말한다. 민중 속으로 가라는 뜻이다. 농촌의 현장으로 들어가 사회를 변혁시키자는 농촌계몽 운동은 당시 귀농·귀촌의 한 모습이다.
지금 우리 농촌 사회는 선조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궁금하다. 아직도 불합리한 모습이 남아 있다고 지적할까, 이제 농촌은 살만하다고 안도할까. 글쎄다. 지금 귀농·귀촌은 그저 소멸이 예상되는 지방을 살리려는 인구 유지 정책인가, 여유로운 도시민의 세컨드 하우스이자 재테크 수단일 뿐인가. 농촌이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농촌을 살리려는 사람이 늘고 그에 대한 정책이 나와야 할 텐데 철학과 명분 없는 지원정책만 10여 년째 나열되고 있는 것이 아쉽다.
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