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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적 히피’ 정찬승, 맨해튼서 영양 보충한 음식은 설렁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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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호 26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투명풍선과 누드’ 등 1960년대 말 행위미술의 현장에는 언제나 정찬승이 있었다. 사진은 87년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의 정찬승. [사진 임영균]

‘투명풍선과 누드’ 등 1960년대 말 행위미술의 현장에는 언제나 정찬승이 있었다. 사진은 87년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의 정찬승. [사진 임영균]

1960년대 후반 신문의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더 자주 등장하는 미술가가 있었다. 작가 정찬승(1942~94)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미술행위를 사회저항이라고 했지만 세상은 퇴폐라고 알아들었다.

60년대 신문 사회면 장식한 미술가 #‘투명풍선과 누드’‘한강변의 타살’ #시대 앞서간 감각·통찰로 오해받아 #백남준 ‘피아노의 정사’에 출연도 #뉴욕선 잡동사니 모아 정크아트로 #90년 서울로 온 뒤 신촌 골목 누벼

68년 5월 30일 서울 종로1가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정찬승·강국진(1939~92)의 연출로 정강자(1942~2017, 가수 남일해의 여동생)가 퍼포머로 등장하여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해프닝을 1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정강자의 알몸에 투명풍선을 달고 터뜨리는 행위미술이었다. 25세의 풋내기 화가였던 정강자는 완전 알몸이 되길 원했으나 바깥에서 연행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경찰을 의식해 팬티 한 장은 남겨 두었다.

그해 10월 17일에는 ‘한강변의 타살’이란 퍼포먼스가 양화대교 아래서 벌어졌다. 정찬승·강국진·정강자가 중심이 된 행위미술이었다. 모래밭 구덩이에 묻혀 있다가 물세례를 받고 구덩이에서 나온 후 몸 위에 비닐을 걸치고 그 위에 문화 사기꾼, 문화 실명자, 문화 기피자, 문화 부정축재자, 문화 보따리장수, 문화 곡예사 등을 쓰고 나서 이 글들을 읽고 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사회저항 퍼포먼스, 50년 전엔 퇴폐로 몰려

1969년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정찬승과 차명희가 ‘피아노의 정사’를 실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1969년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정찬승과 차명희가 ‘피아노의 정사’를 실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69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 총연출은 실험미술가 김구림이 맡았다. 백남준의 ‘피아노의 정사’는 백남준의 지시서와 김구림의 연출, 정찬승과 화가 차명희의 실연으로 이루어졌다. 검은 장막을 뒤집어쓴 남녀 한 쌍이 뒤엉켜 있고 네 개의 다리가 내려와 발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행위였다. 코리아헤럴드 기자였던 가수 한대수가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 일로 정찬승과 한대수는 급격히 친해졌다.

60년대로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였다. 투명풍선과 누드는 2017년 7월 홍대앞의 루프에서 재연됐다. 한강변의 타살은 지난해 10월 양화한강공원에서 재연됐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감각이지만 50년 전에는 퇴폐와 풍기문란으로 몰렸다.

정찬승은 시대를 앞서간 감각과 통찰력 때문에 오해를 받았다. 60년대 후반이라면 파리의 68학생혁명, 월남전, 히피문화, 일본의 전공투운동 등이 시대적 키워드였다. 이들과 무연하게 한국은 국가 주도로 경제발전의 급성장을 위해 대부분의 국민이 국책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똑바로 걸어갈 때 횡보를 하거나 상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깊은 사유와 통찰에 빠지는 것도 불온으로 간주되기 마련이었다. 돌발성이 수시로 노출되는 행위미술은 신문의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을 장식하는 위험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행위미술의 현장에는 언제나 정찬승이 있었다. 정찬승은 한국에서 배출된 유일한 자생적 히피였다.

그는 80년 파리비엔날레 참가를 위해 파리로 갔다가 1년 가까이 그곳에 머물렀다. 파리에 있는 동안 정찬승은 용케도 미국 비자를 얻어 뉴욕행을 감행했다.

뉴욕으로 간 정찬승은 맨해튼의 첼시호텔 옆에서 살았다. 작업실이 딸리지 않은 순수한 거주공간이었다. 뉴욕시절은 궁색하지 않았다. 동부이촌동에 있다가 방배동으로 옮긴 카페 ‘장미의 숲’을 운영하던 동생이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정찬승은 키가 컸다. 얼굴을 반쯤 덮은 거뭇한 수염과 장발, 검은색 가죽바지는 평균적인 한국인의 외양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다양한 인종이 사는 뉴욕에서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덩치에 비해 식사량은 적었다. 집에서 국수를 끓여 한 끼를 대충 때우는 스타일이었다.

84년께는 브루클린의 그린포인트 에비뉴역 근처로 거주지를 옮겼다. 맨해튼의 집세로 그린포인트에서는 큰 집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린포인트 에비뉴 대로변 1층에 30여 평 되는 공간이 생겼다. 길 쪽의 밝은 곳은 작업실로, 어두컴컴한 안쪽은 침실로 꾸몄다.

정찬승은 남들이 버린 잡동사니를 모아서 미술작품으로 만드는 정크아트를 했다. 무거운 고물들을 들어다 놓기에는 2층보다는 1층이 유리했다. 집 앞 공터에 주어 온 잡동사니들을 적당히 늘어놓았다. 의자를 내놓고 앉아서 대로를 지나가는 미인들을 감상했다.

수많은 한인 예술가가 그린포인트 정찬승의 작업실을 찾았다. 청소년기를 미국에서 보내고 한국에서 잠시 살다 다시 뉴욕으로 복귀한 가수 한대수를 화가 변종곤에게 소개해 주었다. 둘은 곧 친구가 됐다.

한국인 예술가 소호사진전을 방문한 정찬승과 시인 김송희, 김환기 선생의 부인 김향안 여사(오른쪽부터), 1987년 11월. [사진 임영균]

한국인 예술가 소호사진전을 방문한 정찬승과 시인 김송희, 김환기 선생의 부인 김향안 여사(오른쪽부터), 1987년 11월. [사진 임영균]

정찬승은 주변의 동료들을 항상 칭찬하고 후배들에게 따뜻했다. 큰 키와 압도적인 용모와는 달리 말씨가 부드러웠다. 화가는 다른 화가의 칭찬에 인색한 법인데, 정찬승은 변종곤의 그림 실력이 몹시 훌륭하다고 주변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사진가 임영균은 맨해튼 시절부터 정찬승과 가까웠다. 임영균이 가면 옆 가게에서 맥주를 사다 함께 마셨다. 둘은 그린포인트 에비뉴를 따라 서쪽으로 이스트리버까지 걸어갔다. 뉴욕의 노동자와 예술가들이 애용하는 싸구려 블루리본 캔맥주를 따서 마셨다. 블루리본 큰 캔은 버드와이저 작은 캔 가격에 불과했다.

화가 황주리와는 맨해튼 32가에 있는 감미옥을 가끔 찾았다. 정찬승은 감미옥 설렁탕을 좋아했다. 술에 매달리다 보니 주로 영양결핍이기 마련이었던 정찬승에게 유일하게 체력을 향상시켜주는 음식이 감미옥 설렁탕이었다.

불법체류자로 지내던 정찬승이 서울로 다시 올 수 있었던 건 90년이었다. 그해 마침 미국 정부가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사면을 내렸다. 오랜만에 다시 서울을 찾은 정찬승은 기세등등했다. 뉴욕에서 온 살아 있는 전설이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미술평론가 오광수에게 와서는 자신의 전시를 열어 달라고 떼를 썼다. “당신은 작품이 없잖아” 하면, “내 작업실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 그게 다 현대미술이야” 하며 큰소리로 응수했다. 고물이나 잡동사니를 끌어모아 만든 정크아트로 전시를 열어 주는 서울의 일급화랑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황석영 “예술이 주는 보상에 관심 없던 사람”

신촌로터리에서 연세대로 가는 길 왼쪽 골목에 ‘러쉬’가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과 화가들이 진을 쳤다. 맥주를 마시다 흥이 나면 춤을 추기도 했다. 나중에 홍대앞 문화현상이 된 록카페의 원조였다.

홍대 출신인 정찬승은 신촌의 골목이 반가웠다. 지금은 세계적인 미술가가 된 이불이 정찬승과 동행해 러쉬로 갔다. 갑자기 정찬승이 이불의 행위미술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불은 90년 팔다리가 여러 개 달린 기괴한 의상을 입고 12일간 서울과 도쿄를 활보하는 퍼포먼스 ‘수난유감―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알아?’를 펼쳤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전력의 소유자였다. 이불의 부탁으로 또 다른 동행인이던

H가 신촌시장으로 달려가 급하게 생닭을 구해 왔다. 생닭은 러쉬의 자그마한 무대에 놓여졌다. 생닭을 안은 이불이 멋지게 즉석공연을 했다.

황석영은 정찬승을 평하기를 “예술이 주는 보상에 대해 정찬승만큼 철저하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했다. 보상에 무관심한 만큼 그는 순수했다. 그 순수함은 이불 같은 까마득한 후배들이 정찬승을 존경하게 만들었다.

최근에 정찬승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물질적 보상을 철저하게 포기한 예술만이 가져다주는 정신의 자유로움을 정찬승은 마음껏 누렸다. 그의 작품 ‘투명풍선과 누드’에서 부풀어 올랐던 풍선처럼 순수한 인간 정찬승에 대한 그리움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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