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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컨테이너 개수는 맞추지만 빈 채 나가는 것도 많아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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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수출 침체 속 위태로운 항만 경기

수출이 6개월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지만 정작 물류가 드나드는 항구 물동량은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약간 늘었다. 이런 부조화는 수출 감소가 주로 반도체 등 항공수출품목에서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사진 인천항만공사]

수출이 6개월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지만 정작 물류가 드나드는 항구 물동량은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약간 늘었다. 이런 부조화는 수출 감소가 주로 반도체 등 항공수출품목에서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사진 인천항만공사]

지난 5월까지 수출이 6개월 연속 감소했다. 수출로 먹고살고 경제를 일궈온 나라로선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난 2월 -11.4%로 최악을 기록하다 4월 -2.0%로 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5월 다시 -9.4%로 고꾸라졌다. 미·중 무역갈등이 전쟁 수준으로 악화하는 하반기 상황이 영 걱정스럽다. 그런데 우연히 자리를 함께 한 항만 관계자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전국 항만 물동량이 줄기는커녕 조금씩 늘고 있다”는 거였다. “수출입이 이렇게 주는데 물동량이 늘어?”라는 의문부호가 머릿속을 채웠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며칠 뒤 인천항으로 바로 달려갔다.

6개월 연속 수출 마이너스지만 #항구 물동량 4월까진 소폭 증가 #부진한 반도체 비행기로 나가고 #수출액 줄어도 수출입량·환적 늘어 #생존 위한 밀어내기 늘고 #화물기사 일감 없다는 소리 들려 #항구가 흥해야 나라가 살아 #수출동력 유지하게 관리해야

인천 송도국제도시 남서쪽엔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송도처럼 바다를 매립해 만든 인공 섬인 인천 신항이다. 이곳엔 2020년까지 3조6000억원이 투입돼 길이 3㎞에 이르는 컨테이너 전용항만이 건설되고 있다. 현재 컨테이너선 6척이 한꺼번에 접안할 수 있는 1.6㎞ 길이의 터미널 두 곳이 완공돼 운영 중이다.

3일 오후 방문한 인천 신항은 분주했다. 송도 쪽에서 다리를 건너니 시야 양쪽으로 거대한 매립지가 펼쳐졌다. 항구를 운영하기 위한 배후단지가 한창 건설 중이었다. 이곳을 드나드는 덤프트럭과 항구를 오가는 트레일러들이 오가는 길 양쪽을 꽉 채웠다.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 7층에 있는 전망대를 올라갔다. 가로 140m, 세로 124m에 이르는 거대한 하역 크레인들이 눈을 꽉 채웠다. 배가 접안해 있는 선석 옆으로는 무인으로 조작되는 또 다른 크레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크레인들이 옮긴 컨테이너들은 순서를 따라 기다리고 있는 트레일러에 차곡차곡 올려졌다. 수천 개의 컨테이너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항구 어디에서도 경기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인천항만공사 관계자는 “수출이 감소한다지만 항만에선 아직 체감하기 어렵다”며 “2~3월에 조금 줄었던 물량이 4월 회복돼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 인천항만의 사정인 것도 아니다. 국내 최대 항구인 부산항의 4월 물동량은 183만200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4.5%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2월(-0.5%) 반짝 감소했을 뿐 나머지 달엔 4% 이상 늘었다. 광양·울산 등 다른 항구도 마찬가지다. 해수부에 따르면 올 1분기 전국 무역항에서 처리한 항만물동량은 총 3억9589만t을 기록해 작년 같은 기간보다 4.2% 증가했다. 컨테이너 물동량도 전년 동기보다 3.9% 늘어난 706만TEU를 기록했다.

이상한 일이다. 교역액이 줄어드는데 실제 상품이 오가는 항구는 여전히 분주하다. 해수부 관계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유가 뭘까. 항구 관계자들은 공통으로 금액과 물량의 차이를 거론했다. 수출액수가 줄어도 물량이 그대로라 수출액 감소의 영향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천항으로 수출입 되는 화물을 취급하는 인천항공동물류㈜의 한종환 이사는 “중소기업들의 소량 화물을 월 1만4000~1만5000TEU 처리하는데 지난해 4월과 올 4월 차이가 딱 1TEU였다”며 “요즘은 다른 물건이 조금 줄어든 대신 동남아 현지 공장으로 보내는 원단 등 원부자재 수출이 5~10% 늘고 있다”고 말했다. 통상산업부에 따르면 올 3월까지 하락하던 전체 수출물량은 4~5월에 다시 예년 수준을 넘어섰다.

이를 무역전쟁을 앞둔 밀어내기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인천항만공사 관계자는 “데이터를 보면 중국 항만의 물동량도 늘고 있다”며 “험해지는 미·중 무역분쟁을 피해 미리 수출입 물량을 내보내다 보니 동아시아 전체의 교역량이 늘어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인천에 공장을 둔 미산우드 이상원 대표는 금융의 영향을 제기했다. “유전스(Usance) 같은 금융지원 한도를 유지하기 위해 기업 형편이 안 좋아도 일단 수출입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조익노 산업통상자원부 수출입과장은 “수출 감소의 주요인이 반도체라는 점을 잘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 년 전보다 값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수출에 악영향을 준 반도체가 거의 100% 항공으로 수출돼 항만 경기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 5월 4Gb D램 반도체 가격은 3.75달러로 최고치였던 지난해 9월(8.19달러)과 비교하면 무려 54.2%나 하락했다. USB와 메모리 카드 등에 쓰이는 128Gb 낸드플래시는 지난해 12월부터 6개월째 하락 중이다. 수출 비중이 20%인 반도체 수출가격 하락과 물량 감소가 전체 수출입 수치를 악화시키고 있지만, 항만 경기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조 과장은 “반도체를 제외한 한국의 주력 상품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버티고 있고 2차 전지와 바이오 등 새로운 산업의 수출도 선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어느 입장에서 보든 하반기 경기를 우려스럽게 보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하면 한국의 수출입을 포함한 전 세계 교역량 축소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양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액은 전체의 40%다. 중국에 대한 중간재 수출 비중도 80%다. 미·중 관계가 악화하면 사이에 낀 한국의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다. 한종환 이사는 현재 상황을 폭풍 전의 고요에 비교했다. “꽉꽉 차던 컨테이너가 요즘 허술하게 채워져 나가는 경우가 있다. 물건을 수입해왔던 컨테이너가 수출품을 싣지 못해 비어 있는 상태로 나가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이상원 사장은 “수익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덤핑으로 일단 살고 보자는 회사가 많아졌다”고 전했다. 항구 주변에선 “하루 2번은 운송해야 하는 2만여 화물 트럭 기사들이 일감이 없어 먹고 살기 어렵다고 푸념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인천항만공사 김윤상 과장은 “인천항이 인천 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할 만큼 중요하다”며 “공사도 미·중 무역분쟁에 대한 비상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환적 물량 유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미·중 무역분쟁이 전쟁으로 비화하더라도 수출 동력만큼은 꺼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병기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수석연구원은 “가장 두려운 건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단기적 직접피해가 아니라 투자·소비 감소에 따른 장기적 위축”이라며 “기업들이 가장 답답하게 느끼는 부분인 정확한 정보와 수출 네트워크 재정립을 위한 비용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경제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임기영 한국외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영국 대처 총리와 미국 레이건 대통령 시대 이후 이어져 온 세계화 추세가 더는 이어지기 힘들어 보인다”며 “장기적인 경제 정책에서 수출만 중시하기보다는 내수산업을 활성화해 외풍의 영향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항구가 흥해야 나라가 산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지금 흔들리고 있는 우리 항구에 어떻게 활기를 불어넣을지 모두의 고민이 필요한 때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