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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부러운 미국의 성장, 답답한 한국의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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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격세지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한국 경제는 탐구 대상이었다. 고속 성장하는 비결이 뭔지 수많은 나라가 궁금해했다. 그러던 한국의 처지가 바뀌었다. 경제 규모가 한국의 13배인 미국이 성장 속도에서 한국을 추월했다. 지난해 미국은 2.9%, 한국은 2.7% 성장했다. 올해 역시 미국이 한국을 앞설 것이라는 게 국제기구들의 관측이다. 이제 한국은 고속 성장은커녕 침체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급기야 한국은행이 미국의 성장 비결을 들여다보기에 이르렀다. 그제 한은이 내놓은 ‘최근 미국 잠재성장률 상승 배경’ 보고서의 내용이다.

한은은 일단 미국 경제의 기초체력(잠재성장률)이 튼튼해진 게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고 진단했다. 근래의 성장이 반짝 이벤트가 아니라는 의미다. 잠재성장률이 오른 이유로는 세 가지를 들었다. ‘①기업 투자 ②노동시장 호조 ③생산성 제고’라고 번호까지 매겨 표기했다. 미국은 양적 완화로 자금이 풍부해진 가운데 법인세를 대폭 깎아 기업들의 ‘애니멀 스피릿(animal spirit·공격적 투자 본능)’을 자극했다. 투자가 이어져 일자리가 늘었다. 이로 인해 실업률은 거의 50년래 최저가 됐다. 여기에 고부가가치 산업인 정보통신기술(ICT) 비중이 높아져 생산성까지 올랐다.

한은은 “대외 부문에서 부정적 충격이 발생하지 않으면 중장기적으로 미국 경제는 성장잠재력이 뒷받침돼 양호한 성장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답답하다. 모든 게 한국과 정반대여서다. 국내 기업 투자는 그야말로 바닥이다. 올 1분기 국내 설비투자는 1년 전보다 무려 19.5% 감소했다. 기업들이 정부·노조의 압박과 규제에 치인 결과다. 이런 환경을 피해 기업들은 줄줄이 해외로 나가고 있다. 이른바 ‘투자 망명’이다. 일자리에는 ‘참사’라느니 ‘재앙’이라는 표현이 1년 넘게 따라다니고 있다. 청년 체감실업률은 역대 최악이고, 30~40대 일자리는 줄어만 간다.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OECD 최저 수준인데도 임금은 치솟고 있다. 생산성을 높여 줄 ICT 산업은 온갖 규제에 묶여 꼼짝달싹 못 한다.

정부는 그간 성장률이 떨어진 이유를 “경제 규모가 커진 데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식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는 걸 미국이 보여줬다. 족쇄를 풀어 기업의 투자를 끌어내고 생산성을 높인 것 등이 답이었다. 이래도 정부는 이 길을 외면한 채 소득주도 성장만 붙들고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