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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뉴스]청각장애가 그의 감각 키웠다...탐지견과 대화하는 남자, 이호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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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심곡서원. 조선 시대 문신 조광조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주변을 잉글리시 스프링어 스패니얼 품종의 개 2마리가 분주하게 맴돌았다. 에버랜드가 위탁·운영하는 에스원 탐지견센터 소속 흰개미 탐지견들의 훈련 현장이다.

목조 문화재를 갉아 훼손하는 흰개미의 흔적을 후각으로 찾는 것이 탐지견의 임무. 한 나무 기둥에서 ‘킁킁’하는 숨소리가 커졌다. 핸들러(handler·개 훈련사)가 숨겨 둔 죽은 여왕개미의 흔적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자했어(잘했어).” 심곡서원 곳곳을 오가며 고생한 탐지견 아라(6·암컷)를 쓰다듬는 핸들러 이호진(36)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호진(36) 핸들러가 탐지견 아라(6)와 경기도 용인시 심곡서원 주변을 돌며 흰개미 탐지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에스원탐지견센터]

이호진(36) 핸들러가 탐지견 아라(6)와 경기도 용인시 심곡서원 주변을 돌며 흰개미 탐지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에스원탐지견센터]

이씨의 발음은 다소 어눌했지만 대화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청각장애인이다. 3살 무렵 심한 열병을 앓은 뒤로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귀에 낀 보청기로 ‘어디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 정도만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수화’보다 ‘구화’(입으로 말하는 것)를 선호했던 부모님 덕분에 다른 사람의 입 모양을 보고 의사소통을 한다.

프로게이머에서 청각장애 탐지견 훈련사로

이씨가 탐지견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게이머로 활약하며 세계 대회 8강에 진출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던 중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을 느꼈다. 기흉(폐에 구멍이 생기는 증상)이었다. 3차례 수술을 받는 동안 게이머로서의 감이 떨어졌다고 느낀 그는 다른 직업을 고민했다.

그러다 청각장애 도우미견 훈련사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안 키워본 동물이 없을 정도로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고, 본인과 같은 청각장애인을 돕는 개를 키우고 훈련하는 일에 매력을 느낀 그는 큰 고민 없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렇게 그가 길러낸 청각장애 도우미견만 11마리에 이른다.

이호진(36) 핸들러와 탐지견 아라(6). [사진 에스원탐지견센터]

이호진(36) 핸들러와 탐지견 아라(6). [사진 에스원탐지견센터]

청각장애 도우미견을 돌보면서 그는 다른 개들의 훈련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중에서도 흰개미 탐지견이 끌렸다고 한다.

그는 “흰개미 탐지견은 타깃을 발견하면 앉거나 엎드리는 등 방법으로 핸들러에게 알리는 다른 탐지견과 다르다”며 “정확한 피해 부분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흰개미 냄새가 나는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설명(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씨 발음을 그대로 옮겨적지 않음)했다.

이렇게 이씨는 2015년 흰개미 탐지견 핸들러가 됐다. 자신이 담당하는 탐지견 아라와 함께 지금까지 전국 51곳의 문화재에서 흰개미 서식지 8곳과 흔적 지 2400여 곳을 발견했다.

뛰어난 관찰력 등으로 탐지견 심리 파악에 탁월

자신만만하게 시작했지만 일은 쉽지 않았다. 탐지견으로 활약하는 잉글리시 스프링어 스패니얼 종의 장난기(?) 때문이다. 호기심과 집중력이 뛰어나 흰개미 탐지견으로 제격이지만 워낙 활동적이다. 흰개미가 없는 데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등 오반응하기도 한다.

이씨는 “마약 탐지견 등 다른 탐지견은 현장에서 바로 탐지 결과를 확인할 수 있지만, 흰개미 탐지견은 문화재를 현장에서 뜯어볼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며 “탐지견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게 개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호진(36) 핸들러와 탐지견 아라(6). [사진 에스원탐지견센터]

이호진(36) 핸들러와 탐지견 아라(6). [사진 에스원탐지견센터]

장애는 오히려 도움이 됐다. 청각장애인은 시각에 많이 의지하기 때문에 관찰력이나 바디 랭귀지(몸짓 언어) 등을 읽는 능력이 비장애인보다 뛰어나다. 탐지견의 미세한 몸짓만 보고도 오반응 여부를 바로 알아차린다. 개의 심리는 물론 당일 컨디션도 한눈에 알아차린다. 현장 등에서 급체 등으로 고생하는 탐지견의 상태를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것도 이씨다.

그는 “평소 탐지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며 “그래서 개들의 심리 등을 잘 파악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호진(36·가운데) 핸들러가 동료들과 포즈를 취했다. 심상원(50·왼쪽) 핸들러와 이진용(37·오른쪽) 핸들러는 청각장애인인 이 핸들러를 위해 수화까지 배웠다. [사진 에스원탐지견센터]

이호진(36·가운데) 핸들러가 동료들과 포즈를 취했다. 심상원(50·왼쪽) 핸들러와 이진용(37·오른쪽) 핸들러는 청각장애인인 이 핸들러를 위해 수화까지 배웠다. [사진 에스원탐지견센터]

그가 핸들러로 활약하는 데는 동료들의 도움도 컸다. 흰개미 탐지는 핸들러 3명이 한 조로 활약한다. 개를 다루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핸들러 간의 호흡도 필수적이다. 이에 동료 핸들러인 심상원(50)·이진용(37)씨는 직접 수화를 배웠다. 여기에 필담이나 대화 내용을 문자로 변형해주는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 등도 이용해 대화엔 큰 불편이 없다.

팀의 맏형 격인 심씨는 “호진이가 구화를 하긴 하지만 좀 더 원활하게 소통하고 싶어 수화를 배웠다”며 “프로게이머 경력 덕인지 컴퓨터도 자유자재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도움을 받는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매년 6월 3일은 이씨같은 청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을 위한 ‘농아인의 날’이다. 그러나 이씨는 “청각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 장애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곧 편견”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는 배드민턴 선수로 활약했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고 프로게이머, 핸들러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내가 비장애인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 본 적이 없다”며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세계에서 인정받는 최고의 훈련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용인=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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