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본사에 도착한 30일 기자의 눈앞에 딴 세상이 펼쳐졌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당시 '광화문 촛불시위'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경찰 기동대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 기동대원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경기남부청에서 지원 내려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동대원 바로 옆에 서 있는 경찰 버스에는 '서울'이라고 쓰인 지역 구분 푯말이 선명했다. 현대중공업 회사분할 안건이 오른 주주총회에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총력 저지를 선포하자 경찰이 서울·경기 등 전국에서 기동대 60개 중대를 끌어모아 4200여명에 이르는 이들을 울산 동구에 집결시켰다.
[취재일기]
주총 'D-데이'인 31일 오전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노조원 5000여명(노조 측 추산)과 경찰 4200여명, 여기에 현대중공업의 주총 진행 요원 500여명이 더해졌다. 오전 8시부터 주총에 참여하려는 주주와 임원, 요원이 주총 예정지인 울산 동구 한마음회관 앞에 몰려들었다. 이들이 노조원과 험악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팽팽했던 긴장감은 끊어질 듯 고조됐다.
총 1만여명 규모의 충돌에서 정부는 없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민간기업의 경영 의사결정과 관련한 부분이라 산업부에서 의견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조선산업을 책임지는 정부부처라는 존재감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 울산고용노동지청 관계자도 "5월 중순~하순 두 차례 현대중공업 노사를 각각 방문해 노조 측에는 쟁의행위를 위한 절차가 갖춰져 있지 않아 파업을 강행할 경우 불법의 소지가 있으니 불법요소를 없애고 진행하라고 지도했다"고 말했다. 노조법상 쟁의행위는 임금·처우 개선 등 ‘근로조건 향상’을 관철하려는 목적으로만 허용된다. 이번 노조의 파업은 사실상 경영권 개입으로 불법이다. 결국, 고용부는 불법 파업이 예고된 상황에서도 이를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한 꼴이다.
'뒷짐 정부'의 화룡점정은 이재갑 고용부 장관이 찍었다. 이 장관은 이날 오후 15개 지방고용노동관서장이 참석한 회의를 소집해 "노동조합의 폭력과 점거 등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주장을 해야 하며 불법행위에 대해 관계기관 등과 협조해 법에 따라 조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중공업 노조의 파업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 장관의 엄포는 울산 현장에서 노조-경찰의 대치가 이미 종료되고 2시간여가 지난 오후에 나왔다. 노조가 주총장을 점거해 충돌을 일으킨 시점은 지난 27일 오후. 96시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 장관의 '엄정조치'에서 정부의 눈 가리고 아웅식 늑장대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지방 정부는 오히려 갈등에 기름을 끼얹기까지 했다. 지난 29일 송철호 울산시장은 황세영 울산시의회 의장과 함께 ‘현대중공업 본사 이전 반대를 위한 시민 총궐기 대회’에서 삭발을 했다. 현대중공업의 분할 이후 신설되는 한국조선해양 본사가 서울로 이전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에서였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시장이 본사 존치를 주장하며 삭발식까지 한 것에 분쟁 중재자는 어디에도 없음을 느꼈다"고 푸념했다.
이날 회사가 긴급히 주총장을 바꿔가면서까지 통과시킨 회사분할 안건은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 기업결합의 첫 단추다. '빅3' 구도와 출혈경쟁으로 힘을 잃은 한국 조선업계의 체질을 개선하는 사실상의 시작점이다. 앞으로 노조의 안건 통과 원천무효 주장과 전 세계 시장에서의 기업결합 심사까지 가시밭길이 예고돼 있지만, 우리 국민은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중재자의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만 하는 답답한 현실이다.
울산=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