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그러한 자연처럼 스스로 그러한 나로 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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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한순의 시골 반 도시 반(6) 

천연기념물 제96호 울진 수산리 굴참나무. 울진의 굴참나무는 굴참나무 가운데에서도 매우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전설이 깃들어 있는 나무로서 문화적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천연기념물 제96호 울진 수산리 굴참나무. 울진의 굴참나무는 굴참나무 가운데에서도 매우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전설이 깃들어 있는 나무로서 문화적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수령이 10년 가까이 된 굴참나무의 이파리는 몇 개나 될까? 가지를 늘어뜨리며 봄을 그렇게 빛내주던 환한 벚꽃은 나무 한 그루에 몇 송이 꽃이 피어 있을까? 족히 수천 개의 이파리와 꽃이 피어 있을 것이다. 그 수천 개의 이파리와 꽃송이에 차별 없이 골고루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서 있는 성자’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지금은 수천 개의 나뭇잎이 큰 창을 비추며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있지만, 시골집에서 처음 맞는 겨울은 무자비했다.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하다’ 속에 이런 무자비함이 숨어 있다니.

스스로 그러한 자연

겨울이 시작될 무렵 우리는 시골집의 널찍널찍한 창 모양대로 뽁뽁이를 재단해 자르고 초벌 도배하듯 물 스프레이를 뿌리며 창마다 방한 장치를 했다. 맑게 밖을 비추던 창이 뿌연 빛을 띠자 마음도 뿌옇게 가라앉는 듯했다.

장작을 패서 벽에 죽 쌓아놓고, 평상시보다 좀 더 일찍 시골집에 내려가 보일러를 돌렸다. 그런데도 시골에서 자는 첫날은 뼛속을 파고드는 듯한 한밤의 추위를 면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극세사 이불을 사고, 온풍기도 사들이고 독감 주사를 맞아야 하나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느 건축가는 건축과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너희는 여름에는 무척 덥고 겨울에는 매섭게 추운, 사계절이 뚜렷한 혹독한 건축 환경에서 앞으로 건축하게 될 것이다”라고 서두를 뗀다고 했다.

초겨울의 무모한 추위가 몇 차례 지나가자 어느 정도 시골 추위에 적응돼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편은 수시로 보일러의 온도를 내리고 나는 “보일러 온도 올렸어요?”라며 연신 확인했다. ‘아니, 이렇게 떨고 있을 거면 뭐하러 시골에 오느냐고. 다시 서울 아파트로 올라가고 싶네’라고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지만, “당신 의붓남편 같아요”라며 수시로 보일러 온도를 내리는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다.

시골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니 남편은 나름 긴장한 듯했다. 장작을 패서 옮기는 비용도 들고, 프로판 가스는 하루 저녁을 돌리고 나면 바로 한 통을 갈아주어야 했다. 연료비는 서울 집, 시골집에서 이중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남편이 수시로 보일러 온도를 내리는 것도 이해는 갔다.

시골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니 남편은 나름 긴장한 듯했다. 장작을 패서 옮기는 비용도 들고 프로판 가스는 하루 저녁을 돌리고 나면 바로 한 통을 갈아주어야 했으니 남편이 수시로 보일러 온도를 내리는 것도 이해는 갔다. [사진 pixabay]

시골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니 남편은 나름 긴장한 듯했다. 장작을 패서 옮기는 비용도 들고 프로판 가스는 하루 저녁을 돌리고 나면 바로 한 통을 갈아주어야 했으니 남편이 수시로 보일러 온도를 내리는 것도 이해는 갔다. [사진 pixabay]

요즘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것을 옛날엔 하인을 40명 정도 두고 사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파트에서는 방 안에서 보일러 온도를 올리면 되니 불 때는 사람을 두었고, 수도는 꼭지를 틀거나 발로 터치를 하면 물이 쏟아지니, 물 주는 사람을 두었고, 전기 주는 사람, 쓰레기 가져가는 사람, 아파트 단지를 지켜주는 사람, 아파트 건물을 관리해 주는 사람 등을 따져 보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굴참나무 숲속에 있는 우리 시골집은 겨우내 굴참나무 낙엽 속에서 살았다. 난로를 피우다가 장작에 불붙는 것이 시원치 않을 때 굴참나무 잎을 욱여넣으면 주황색 불의 순간 화력이 얼굴이 화끈할 정도로 피어오른다. 그렇게 많은 굴참나무 잎을 땠음에도 불구하고 지난겨울 우리 집 근처는 굴참나무 잎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봄이 올 즈음 햇살이 주황빛으로 사방을 녹이자, 방 안의 답답한 공기도 환기할 겸 안방 창을 열었다. 안방 언덕 저쪽 굴참나무 숲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새들이 앉았다 날아가는 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새소리라 하기엔 그 소리가 너무 컸다. 궁금한 마음에 밖으로 나가 그쪽을 기웃거렸다. 예의 그 소리는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약간 무서운 마음을 누르고 계속 소리 나는 쪽을 살펴보니 고라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리가 커질수록 고라니의 모습이 좀 더 가까이 오고, 그 뒤에 아기 고라니도 굴참나무 숲속에서 먹이를 찾는 듯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바스락바스락 굴참나무 잎 밟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가급적 소리가 나지 않게 안방 창문을 닫고 그들이 먹이를 찾으러 방해 없이 가도록 조용히 있었다.

그들과 나는 서로 낯선 존재, 그들은 그들의 길이 있고 나는 나의 길이 있으니, 서로 부딪지 않고 이 시골에서 사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곳은 내가 집을 짓기 전까지 그들이 살던 곳이었다. 새끼 고라니를 데리고 먹을 것을 찾으러 지천으로 뛰어다니던 곳.

지난여름, 이웃의 초대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꽃피우다 늦은 시간까지 앉아 있게 되었다. 가로등도 없는 산길을 헉헉거리고 걸어 올라와 대문에 손전등을 비춘 우리 부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은빛을 띤 뱀 두 마리가 대문 아래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옆문으로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그 여름 내내 혹시 뱀들이 집 안으로 들어올까 봐 방충망 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아직은 서로 많이 낯선 존재들끼리 갑자기 맞닥뜨려 서로를 놀라게 하거나 해치지 않도록 피해 주는 지혜가 필요했다.

대구 수성구 매호동 천을산 인근 한 농가 박터널에 찾아와 풀을 뜯던 고라니가 인기척에 놀라 주변을 살피고 있다. [뉴스1]

대구 수성구 매호동 천을산 인근 한 농가 박터널에 찾아와 풀을 뜯던 고라니가 인기척에 놀라 주변을 살피고 있다. [뉴스1]

시골 생활을 하며 문득문득 만나게 되는 이 무자비함(?) 혹은 물컹거리는 생명 앞에서 가끔 몸이 움츠러든다. 그런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들 앞에서 그저 나도 그러한 듯 견디며 지나가야 한다. 벽 틈을 파고드는 바늘귀 황소바람도, 새끼를 데리고 먹이를 찾는 고라니 앞에서도, 무슨 업인지 온몸을 땅에 대고 이리저리 구불구불 휘며 살아야 하는 뱀 앞에서도 무자비 혹은 자비하게 나도 스스로 그러해야 한다.

아직은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논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조들의 이야기와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존재 이유가 분명히 있기에 그들은 그곳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다. 내가 잠든 시간에도 굴참나무 도토리는 종자를 떨어뜨리고, 내가 번민에 싸인 시간에도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어 뿌리를 깨운다.

어느 날 서울의 오래된 호두나무 그늘 카페에서 필자분과 그저 소소하게 일상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도시나 시골이나 무자비하기는 마찬가지예요” 하는 말을 쑥 내뱉고 말았다. 필자분은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는 무슨 마음으로 이런 표현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시골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버거운 생명, 도시에서 턱턱 가려진 시멘트벽을 밀고 들어가 먹이를 찾아야 하는 어떤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시골집 아래 마당 비탈에 쌓인 굴참나무 나뭇잎을 갈퀴로 걷어내다가 굴참나무 나뭇잎의 보호 속에 자라던 자그마한 보랏빛 각시붓꽃을 만났다. 낡은 갈색빛 마른 나뭇잎 사이로 나온 남보랏빛 각시붓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굴참나무 나뭇잎과 각시붓꽃이 미리 약속해 계약하고 서로를 지켜주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각시붓꽃 앞에서 나는 갈퀴 질을 멈추고 그 아름다움에 또 몸을 움츠렸다.

버겁도록 아름다운 것들이 마구 피어나는 계절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산들은 연두가 성숙하여 초록으로 살이 오르고 눈을 두는 곳마다 계절의 꽃들이 삐죽빼죽 고개를 내민다. 묵묵히 겨울 묵상에 들었던 나무들도 가지 끝마다 푸른 잎을 달고 바람의 지휘에 합창한다.

자비·무자비가 비빔밥 된 여름이 오면

저 생명이 자비한 것인지 무자비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30년 가까이 책을 만들며 확립했던 개념들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단어의 정의로만 볼 때는 자비와 무자비는 서로 반대 개념으로 다른 쪽에 서 있어야 하나, 요즘 나에게는 그들이 연결된 하나의 고리로 보인다. 고리에 고리를 연결하면 나도 그곳에 연결될 것이고, 인간도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라는 사실이 자명할 것이다.

도대체 벗어날 길 없는 내 시야, 내 몸, 내 각도에서 볼 뿐, 내가 주인공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 주인공이면서 스스로 그러한 모두에게 조연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굴참나무로, 누군가에게는 고라니로, 누군가에게는 굴참나무 잎의 보호를 받고 피어난 보랏빛 각시붓꽃으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 앞에서 나는 자비와 무자비가 비빔밥이 된 여름을 맞게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전적 정의가 무너지는 것이 한편으로 혼란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무엇인가 그동안 나를 누르고 있던 금형 프레스 같은 것이 가벼이 날리는 아카시아 향기에 실려 사뿐히 사라진 기분이다.

한순 시인·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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