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관습 깨는 왕자비 매건 마클, 사당에 불지른 손병사 어머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34)

영국의 왕실 부부 메건 마클(왼쪽)과 해리 왕자(오른쪽)가 지난 8일 영국 남부의 윈저 성에 있는 세인트조지 홀에서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영국의 왕실 부부 메건 마클(왼쪽)과 해리 왕자(오른쪽)가 지난 8일 영국 남부의 윈저 성에 있는 세인트조지 홀에서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최근 영국 왕실에서는 생명 탄생의 경사를 맞이했다. 해리 윈저 왕자에게 아들이 생긴 것이다. 로열 베이비의 탄생은 영국 국민에겐 국가적 행사로서 모처럼 왕가를 중심으로 그들의 자긍심을 한껏 드높이는 사건인 것 같다. 그런데 해리 왕자의 부인 메건 마클은 로열 베이비 공개 행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실제로 출산 이틀 후에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국민의 분노를 샀다.

“대중은 그들의 세금이 투입되는 삶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더선
“로열 탄생을 즐거운 국가적 축하행사로 여기는 사람들에 전례 없는 모욕이다” -익스프레스

메건 마클은 현대판 신데렐라로서 미모와 감각, 왕실 바깥 혈통, 자유분방한 면모 등에서 다이애나 스펜서와 공통점이 많다. 그래서 자주 비교되는데 다이애나보다 좀 더 당찬 면모가 있어 보인다. 출산 직후 사진 찍기를 거부한 데 이어 출산 이틀 만에 아기와 함께 나타났을 때는 아빠인 헨리 왕자가 아기를 안고 아직 꺼지지 않은 불룩한 배를 한껏 자랑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영국 왕실의 금기 줄줄이 깬 마클

메건 마클이 보여준 모습은 지난 40년간 이어진 영국 왕실의 아기 공개 관례를 깬 것이었다. 사진은 해리 왕자와 결혼식 당시 메건 마클의 모습.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메건 마클이 보여준 모습은 지난 40년간 이어진 영국 왕실의 아기 공개 관례를 깬 것이었다. 사진은 해리 왕자와 결혼식 당시 메건 마클의 모습.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메건 마클이 보여준 모습은 지난 40년간 이어진 영국 왕실의 아기 공개 관례를 깬 것이었다. 시어머니인 다이애나 스펜서나 동서인 케이트 미들턴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메건 마클은 출산 직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미 이혼·혼혈·연상·미국인·가톨릭 신자라는 이력만으로도 왕실의 금기를 줄줄이 깨버린 상태인지라 그녀가 앞으로 영국 왕실에서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

관습은 체제 유지를 위해 부지런히 다듬어지며 공고해지는 특성이 있다. 가부장의 권위는 그것을 목숨 걸고 지켜내려 애쓰는 남성들에 의해 유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보단 주변 혹은 외부의 존재인 여성에 의해 균열이 생기는 면도 있는 것 같다.

경남 밀양 지역에는 손병사라는 무인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승된다. 손병사 본인보다는 손병사의 어머니와 관련한 이야기에 좀 더 관심이 가는데 이 여인이 보통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나 담력이 센지 귀신과도 맞짱 뜨고 자식들을 낳는 족족 귀신이 데려간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눈도 끔쩍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밀양다죽리손씨고가(密陽茶竹里孫氏古家). 일명 ‘손병사고택’으로 널리 알려진 이 집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있고, 그 좌우에 곳간과 행랑방을 둔 별채가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밀양다죽리손씨고가(密陽茶竹里孫氏古家). 일명 ‘손병사고택’으로 널리 알려진 이 집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있고, 그 좌우에 곳간과 행랑방을 둔 별채가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밀양 산외면 다원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손병사의 조부가 서울에 과거 보러 다녀오다가 충청도 어느 지방에 와서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손병사 조부는 이미 처자가 있었지만 그 여자를 집안에 들였다. 그 여자가 얼마간 살다 세상을 떠났는데 그 뒤로 식구들이 병에 걸려 시달리기도 하고 송사가 생기는 등 집안에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점쟁이에게 물으니 집 안에 조그만 당을 하나 지어 귀신을 잘 모시라고 했다.

그러고 나니 과연 집안이 편안해졌고 손병사의 어머니가 이 집안에 시집오게 됐다. 손병사 어머니가 집 안에 사당이 있고 집안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며 인사를 드리는 것을 보고는 하인들에게 당장 사당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갓 시집온 신부가 집안에서 대대로 모시던 당에 불을 지르라고 하는데 하도 강력하게 나오니까 집안사람들도 차마 말리지 못하고 사당은 불태워졌다.

세월이 흘러 손병사 어머니가 아들을 하나 낳았다. 어느 날 밤 한참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방문을 열고 한 젊은 여자가 들어오더니, “네가 당에 불을 지르고 나에게 불손하게 했으니 네 자식을 내가 잡아가겠다” 며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손병사 어머니는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버렸으면 버렸지 왜 네가 함부로 하려고 하느냐” 며 그 여자가 잡아가기도 전에 아이를 내팽개쳐 버렸다.

사당에 불 지르고 아이 내버린 며느리

손병사 집안에서는 당에 불을 지른 것으로도 모자라 귀신한테 덤빈다고 멀쩡한 아이를 내버린 며느리에 대한 불만과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그를 심하게 학대했다. 그런데도 손병사 어머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나중에 또 아들을 낳았는데 똑같은 일이 생겨 두 번째 낳은 아들마저도 버려졌다. 세 번째에도 아들을 낳았는데 또 밤에 그 여자가 방에 들어왔다.

손병사 어머니가 이번에도 “네가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죽여도 내 손으로 죽인다” 하고는 아이를 덥석 안았다. 젊은 여자는 방바닥에 철퍼덕 꿇어앉아 “내가 당신 아이들을 죽이거나 할 의무나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오. 그 아이들은 그때 안 그랬어도 이미 죽었을 것이오. 그러나 이 아이는 앞으로 병사를 할 아이니 잘 기르시오. 나는 이제 그만 물러갑니다” 하고는 사라졌다.

손병사 어머니는 멀쩡한 아이를 귀신 때문에 두번이나 내다 버렸고 세번째 아이 마저 죽이려했다. [중앙포토]

손병사 어머니는 멀쩡한 아이를 귀신 때문에 두번이나 내다 버렸고 세번째 아이 마저 죽이려했다. [중앙포토]

아마도 이 집안을 대대로 괴롭혔던 귀신도 생전에 남의 첩으로 들어가 충분히 대접받고 살지는 못했기에 원을 품고 해코지를 한 것일 테다. 그렇다고 해도 손병사 어머니는 귀신한테 맞짱 뜨며 자기 자식도 내버렸다. 나중에 어차피 단명할 아이였다는 해명이 주어지긴 하지만 처음 이 이야기를 보았을 때는 뭔가 씁쓸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여성이 보인 태도는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귀신도 그럴 만했고 손병사 어머니는 자신이 머리 굽히고 기꺼이 따를 만한 권위가 아닌 것이 분명했기에 거기에 저항하며 대찬 모습을 보인 것이다. 우리 옛이야기에서 자식을 좀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는 의식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전통적 가치관의 한계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다.

다시 메건 마클의 존재성을 사유해 본다. 미국인이고 흑인 혼혈에 이혼녀고 연예계에서 활동했으며 심지어 왕자보다 나이도 많은 여자가 영국 왕실의 며느리가 됐다. 아웃사이더(outsider)로서의 정체성이 이만큼 확고할 수 없다.

온갖 종류의 아웃사이더를 체화한 상태인지라 온전히 기존 체제의 수호자로서 존재하던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메건 마클에게는 보였을 것이다. 주변에서 중심을 사유하는 시선이 예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여러모로 그런 예리한 시선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