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친일파 트럼프’를 만든 아베의 반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하나는 분명해졌다. 미국이 일본 편에 확실히 섰다는 사실이다. 일본을 국빈 방문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골프 카트에 탄 채 활짝 웃으며 찍은 ‘셀카’ 사진을 보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국과 일본이 날카롭게 갈등을 빚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트럼프는 보란 듯이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게 아닐까.

트럼프, 요란한 일본 국빈 방문 #“미·일은 보물 같은 동맹” 선포 #한국은 미·북·중·일에 홀대당해 #외교 책임자들 자리 건재 염치없어

세계 경제 1, 3위 두 정상의 브로맨스(bromance)가 던져준 이미지는 강했다. 함께 골프 치고, 스모 보고, 로바다야키에서 저녁 먹고, 정상회담하고, 나루히토 일왕의 만찬에 가는 등 아예 붙어 다녔다. 아베는 ‘관광가이드’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비굴할 정도로 지극정성을 쏟았다.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진심을 담은 일본식 접대)라지만 이렇게 극진하고 끈끈한 정상외교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2차대전 적국이었던 일본의 자위대 전함에 승선한 장면은 함축적이다. 일본의 군사 대국화와 아베가 꿈꾸는 ‘전쟁할 수 있는 나라’에 대한 미국의 승인인 셈이다. “미·일은 보물 같은 동맹(treasured alliance)”이라고 전 세계에 선포하면서 말이다.

이런 요란한 옆집 잔치를 보면서 한국민으로서의 필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트럼프의 태도는 지난달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했던 때와 너무도 비교된다. 당시 문 대통령은 1박3일의 빡빡한 스케줄을 짜고 날아갔지만 트럼프와 독대했던 시간은 단 2분에 그쳤다. 그렇게 바쁜 트럼프가 아베에게 내준 시간은 11차례 정상회담 25시간45분을 빼더라도 5회 골프 친 시간만 16시간10분이라고 일본 언론은 전한다. 골프를 치냐 안 치냐가 아니라 성의와 배려의 문제다. 마치 내가 당한 괄시처럼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베는 트럼프를 ‘친일파’로 만들며 판을 뒤집었다. 트럼프의 입에서 동해가 아닌 “일본해”란 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북핵 협상에서 ‘재팬 패싱(Japan passing)’을 걱정하던 일본은 새로운 ‘중재자’로 나설 기세다. 아베는 “북한 문제에서 미국과 일본의 입장은 완전히 일치한다. 김정은을 아무 조건 없이 만나겠다”고 큰소리쳤다. 다음달 28~29일 오사카 G20 정상회의는 꽃놀이패다. 아베로서는 한·일 정상회담을 해도 좋고, 안 해도 밑질 게 없다. 아쉬운 쪽은 우리다. 교착상태의 북핵 문제에 돌파구를 뚫으려면 트럼프를 붙들고 있는 아베를 만나 측면지원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일본의 강제징용 해법을 일부 수용해야 하는데, ‘친일 척결’을 외쳐댔으니 덥석 물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웃이 주최하는 국제행사에 갔는데 주인과 단독회담도 못 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그런 망신이 따로 없다. 일본을 얕잡아 본 청구서가 날아들고 있다.

미국의 권력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영원한 이익만이 존재한다’는 걸 간파한 아베의 집념은 무섭다. 한·미 동맹이 이완되고 미국이 일본에 기울어졌다는 소문이 한반도 주변에 나돌면 우리 체면은 더 구겨진다. 중국은 한국을 더 만만히 볼 테고, 북한은 미국과 껄끄러운 중재자 한국을 더 무시할 것이다. 미·북·중·일 사이에서 외톨이로 고립되는 서글픈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당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오사카 G20에 참석했다가 한국에 들러달라는 우리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2017년 12월 문 대통령 방중 때 ‘혼밥’의 냉대를 참아가며 비위를 맞췄건만 허사였다. 오히려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자 줄 서라며 사대(事大) 외교를 부활하려는 게 중국이다. 미·중 무역전쟁 속 미국의 ‘반(反)화웨이’ 대열에서 이탈하라고 압박하는데, 사드(THAAD) 사태의 치욕과 악몽이 떠오른다.

북한 김정은에게 미국이 뒤에 없는 한국은 효용가치가 없다. 그래서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고, 북한에 올인해 온 정부에 대고 ‘족제비’ ‘낯짝’ 등 악담과 막말을 쏟아내며 더 분발하라고 훈계한다. ‘우리민족끼리’도 좋지만 업신여김까지 감수해야 하는 건 불쾌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한·미 정상회담 뒤에 “한신(韓信) 장군은 어렸을 때 동네 부랑아에게 고개 숙이고 가랑이 밑을 기었다고 한다”며 과하지욕(跨下之辱)의 중국 고사를 꺼냈다. 부시 대통령을 부랑아에, 자신을 한신에 빗대며 미국의 힘에 굽힐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굴욕적인 외교를 토로했다. 그게 16년 전이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북한·일본에 과하지욕을 당하는 더 고약한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이다.

경제력과 국제적 위상은 비례한다. 문 대통령은 “30-50 클럽, 즉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이면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이룬 세계 일곱 번째 나라가 됐다”고 자랑했다. 미국·일본은 물론이고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 30-50 클럽 국가들이 외교무대에서 이런 수모를 당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와 현실을 가리지 못하는 현 정부의 어설픈 ‘운동권 외교’가 우리 국민의 자존심에도 상처를 남기고 있다. 이 지경으로 만든 외교 책임자들이 자리에 건재한 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