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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중독, 인류 논쟁거리···트랜스젠더처럼 질병서 빠질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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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병규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은 청바지 차림을 즐긴다. 이날은 복장에 격식을 갖추고 인터뷰했다. 배경은 게임 ‘배틀 그라운드’에 나오는 물품들이다. [강정현 기자]

장병규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은 청바지 차림을 즐긴다. 이날은 복장에 격식을 갖추고 인터뷰했다. 배경은 게임 ‘배틀 그라운드’에 나오는 물품들이다. [강정현 기자]

게임업계가 난리다. 게임중독을 질병에 포함한 세계보건기구(WHO)의 결정 때문이다. 빨라야 2026년에나 국내 제도에 반영된다지만, 자칫 마약 비슷한 것으로 낙인 찍혀 게임산업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업계에 감돈다. 한국게임학회와 한국게임산업협회 등은 당장 ‘게임 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지난 29일 기자회견에는 게임 영정을 들고 검은 양복을 입고 나왔다. “게임이 현대판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WHO의 결정이 이렇게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반발해야 할 사안일까. 국내 대표 게임 업체 ‘크래프톤’의 장병규(46) 이사회 의장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그는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총리급)이며, 고1·중1·초4 세 아들의 학부형이기도 하다. 일단 ‘게임중독’이란 표현 자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부터 물었다.

[권혁주의 직격인터뷰] #장병규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 #“‘게임중독은 질병’ WHO 결정 #과학·의학 논의 불붙일 기회 #증거·데이터 기반 정책 세우면 #게임 업계 큰 타격 입지 않아”

게임업계는 전부터 ‘중독’ 대신 ‘게임 과몰입’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중독’은 적절치 않다는 것인가.
“중독이란 게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대중이 흔히 말하는 건 ‘게임 폐인’이다. 게임을 과하게 많이 한다는 의미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 ‘커피 중독’과 비슷하다. 또 다른 중독은 의학적 용어다. 이건 구분해야 한다.”
흔히 얘기하는 게임중독이 의학적으로 규정하는 ‘중독’과는 다르다는 것인가.
“마약은 먹었을 때 몸에서 특수한 물질이 분비돼 뇌가 변해서 끊지를 못한다. 또 신체적으로 안 좋은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 게 의학적·과학적인 ‘중독’이다. 그러나 게임이 이런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또 하나, 마약은 그 자체가 중독을 유발한다. 도박도 그렇다. 하지만 게임은 좀 다르지 않나. 최근 연구조사를 보면 학업 스트레스나 가정환경 같은 게 게임을 끊지 못하는 요인이라고 한다.”
게임 업체의 목표는 사람들이 자꾸 하는 인기 게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중독성이 없다고 할 수 있나.
“의학적 중독과는 다르다. 다만, 극히 일부 게임은 의학적 중독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본다. ‘바다이야기’ 같은 게 있다.”
바다이야기는 도박이다.
“게임 중에 도박 같지 않아 보이는데 속을 까보면 도박일 수 있는 게 있다. 이런 걸 가려내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 게임을 전부 도매금으로 넘기는 건 문제다.”
확률형 아이템(게임에서 돈을 주고 사지만, 막상 성능은 산 뒤에야 알 수 있는 아이템)이 있는 게임을 말하는 건가.
“도박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게임에 빠진 젊은 부모가 아기를 방치해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게 게임의 문제인지 사람의 문제인지…. 동일인이 게임이 아니라 다른 걸 탐닉해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아주 소수의 게임은 그런 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사견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WHO는 ‘게임중독(gaming disorder)’이란 표현을 넘어 질병으로까지 규정했다.
“컴퓨터·온라인 게임의 역사는 이제 40년 정도다. 길지 않다. WHO의 결정은 인류가 게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논쟁하는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이것이 게임에 대한 과학적·의학적 논의를 불붙이는 전기가 될 수 있다. 이번에 WHO는 일종의 성 정체성 장애로 규정했던 트랜스젠더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다. 문제라고 했다가 인류가 고민하고 논쟁해 ‘여러 정신 상태 중에 하나’라고 했다. 게이밍 디스오더도 시간이 흐르면 질병 목록에서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장 의장은 이 부분에서 ‘게임 중독’ 대신 ‘게이밍 디스오더’란 단어를 사용했다.)
공동대책위원회가 영정까지 들고나온 것에 비하면 WHO의 결정을 그리 비관적으로 보는 것 같지 않은데.
“공대위의 행동은 맥락이 있다. 게임업계는 나름대로 수출 산업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했다. 그런데 지난 정권부터 게임을 마약 취급하는 느낌을 받았다. 업계 사람들이 정부기관을 만나고 오면 다 그렇게 말했다. 그런 게 켜켜이 쌓여오다 이번에 표출됐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게임 산업이 흔들리는 상황이었나.
“몇 년 전부터 사원 면접을 할 때 ‘부모님이 게임 업계에서 일하는 거 반대하시지 않느냐’고 묻는다. 점점 반대가 많아지고 있다. 계속되면 인재를 뽑기 어려워진다.”
WHO 결정으로 국내 게임업계가 얼마나 더 타격을 받을까.
“게임의 순기능을 즐기는 사람이 굉장히 많지 않나. WHO 결정과 관련해 국내 제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생산적이고 과학적인 논의가 이뤄지면 별 타격은 없을 것이다.”
논의가 바라는 방향으로 흐를까.
“(WHO에 찬성하는) 보건복지부나 (반대하는)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특정 부처가 아니라, 국무조정실을 중심으로 민간협의체를 만들기로 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웠다. 정부가 조율하겠다는 국무총리 말씀에 공감한다. 앞으로 협의체에서 업계가 목소리를 명쾌히 내면 된다. 앨빈 토플러는 ‘컨센서스·일관성·과학 등 진실을 골라내는 6가지 필터가 있다’고 했다. 그중에 유일하게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아갈 수 있는 게 과학이다. 컨센서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과학이 필요한 때다. 협의체가 과학적인 자세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증거와 데이터 중심으로 정책이 가야 하지 않겠나.”
업계에서는 WHO 결정을 계기로 모바일 게임 셧다운제가 도입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셧다운제 : 특정 시간에 게임 서비스를 하지 않는 것. 현재 16세 미만 청소년은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온라인 PC 게임 접속을 할 수 없다)
“아닐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실 현재 셧다운제에 대해서는….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원론에는 공감한다. 그렇다 해도 국가가 강제로 하는 건 지혜롭지 못하다. 야간 통행금지하던 시절도 아니고…. 게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리터러시 교육 같은 게 자율성을 키우는 방법이다.”
게임 때문에 청소년들이 잠을 자지 않는 건 문제다.
“시험 끝난 다음이나 방학 때처럼 어쩌다 한 번은 밤늦게까지 게임을 할 수도 있지 않나.”
미국 등지에서는 WHO 결정에 반발한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특정 단체만 반발한 것으로 안다. WHO는 국제기구다. 거기서 만든 인류의 규범을 특정 국가가 무시할 수는 없다. WHO의 결정 사항을 우리나라에 어떻게 적용할지 숙고하고 논의하는 것은 필요하다.”
한국의 게임 산업이 예전만 못하다고들 한다.
“중국과 비교하는 것 같은데, 중국은 아주 거대한 내수시장을 토대로 성장하고 있다. 그걸 한국과 1대 1로 비교하는 건 무리다. 게임산업은 승자 독식이 아니라는 특성이 있다. 재미란 게 다양해서다. 새로운 기업이 얼마든지 생겨나 경쟁할 수 있다. 다만, 새로 태어난 기업이 성장하려면 글로벌 경쟁력이 필수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여건을 훼손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게임산업을 어떻게 바라보나.
“국정감사에서 ‘4차산업혁명위원장이 왜 게임에 신경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게임이 5세대(5G) 통신이나 가상현실(VR)과 연관해 발전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게임은 4차산업의 응용 분야다. 자율주행차 같은 것에 비하면 파급효과가 크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을 대통령 직속 4차산업위원회가 다뤄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단, 게임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분야라는 건 분명하다.” 

◆ 장병규

인터넷 커뮤니티 서비스(네오위즈), 검색엔진(첫눈) 개발 등을 하다가 게임 업계에 뛰어들었다. 업종을 전환한 이유는 “달러를 버는 게 원화만 버는 것보다 더 가치 있어 보여서”라고 했다. 그가 세운 게임 회사 크래프톤은 온라인 슈팅게임 ‘배틀 그라운드’, 롤플레잉 게임 ‘테라’ 등을 서비스한다. 지난해 매출은 1조1200억원, 영업이익은 3000억원이었다. 매출 가운데 87%인 9760억원이 해외에서 나왔다. 대구과학고를 졸업하고 KAIST 전산학과에서 학·석사를 마친 뒤 같은 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권혁주 논설위원, 기록=이정원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