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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문화참견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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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며칠 전 독립·예술영화 블루레이 제작사인 P사의 트위터 계정이 쑥대밭이 됐다. 봉준호 감독 ‘기생충’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축전 중 “지난 1년 제작된 세계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는 대목을 문제 삼은 게 화근이었다.

‘기생충’ 수상 둘러싼 #정치인들의 무리 발언 #사심없는 축하대신 #정치공방 소재 눈살

“국제 경쟁 영화제는 기록 스포츠 경기가 아니며… 이 멘트는 영화 예술의 상대성을 고려 못 한 아쉬운 부분”이라고 썼다. 황금종려상이 곧 세계 1등은 아니고 영화의 작품성은 서열화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줄 세워 1등만 기억하는 사회 분위기도 염두에 둔 발언이었으나, 대통령 지지자들이 발끈했다. “무례하고 어쭙잖은 훈계질” “불매운동하자”란 비판이 쇄도했다. 결국 P사는 공식 사과문을 올렸다. 청와대와 제작진에게도 사과했다.

‘기생충’은 정치권에서도 이슈였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대표는 27일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축하하다가 뜬금없는 대통령 비판으로 마무리해 빈축을 샀다. 수상 축하로 말문을 연 다음, 이번 칸에서 명예황금종려상을 받은 알랭 들롱이 데뷔작 ‘태양은 가득히’에서 거짓말쟁이 역으로 나와 ‘리플리 증후군’이란 말이 생겼는데, 문재인 대통령을 보면 리플리 증후군이 떠오른다고 발언했다. 즉각 “마음에도 없는 축하, 오직 대통령 공격 생각뿐”이란 비판이 나왔다.

제72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감독의 페르소나인 송강호(오른쪽)와 최우식이 부자 관계로 나온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72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감독의 페르소나인 송강호(오른쪽)와 최우식이 부자 관계로 나온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하루 전에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논란이 됐다. 트위터에 “이 경사를 계기로 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을 다시 본다”는 글을 올렸다. 물론 봉 감독이 블랙리스트에 올랐었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자체가 씻을 수 없는 오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마저 전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삼는 자화자찬식 태도가 반감을 샀다. 마치 현 정권이기에 봉 감독의 쾌거가 가능했다는 뉘앙스지만, 과거 봉 감독에게 적용된 블랙리스트의 구체적 면모를 보면 코웃음이 나온다. 가령 천만 영화 ‘괴물’은 ‘반미 및 정부의 무능을 부각. 국민의식 좌경화’, 할리우드 진출작이자 930만 명이 본 ‘설국열차’는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 저항 운동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려놨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백서에 따르면 봉 감독은 2015~2016년 ‘한불상호교류의 해’ 사업 초청 배제자였다. 당시 “그분은 모시고 싶어도 쉽게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라고 했던 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가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이 프로그래머가 진짜 피해자다). 이 무렵 봉 감독은 ‘설국열차’에 이은 두 번째 글로벌 프로젝트 ‘옥자’ 준비로 분주했다. 국내 감독으로는 최초로 넷플릭스와 손잡은 봉 감독은 ‘옥자’를 들고 2017년 칸에 진출했다.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과 ‘비틀스 이후 최고 팬덤’이라는 BTS 신드롬, 그리고 K팝의 약진. 최근 우리 문화의 도약은 눈부시다. 쉬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쿨 한 척 ‘국뽕’을 자제하려 해도 자긍심과 벅찬 감격을 감추기 힘들다. 분단과 정치적 폭압기를 거치며 억눌렸던 한국사회가 역사적 트라우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문화적 역량을 한껏 폭발시키는 모양새다.

한 페친은 칸의 낭보 이후 “대한민국은 정치 빼고는 다 최고”라는 글을 올렸다. “문화는 날로 선진국인데 정치는 왜 날로 후진국이냐”라는 댓글도 올라왔다. ‘기생충’을 놓고도 사심 없는 축하 대신, 여야가 ‘기승전-블랙리스트’ ‘기승전-문재인’이라며 정치적 공격 거리 삼는 것 자체가 낯뜨거운 일이다. 봉준호 영화만큼이나 ‘웃프고’, 후진적인 정치 문화를 보여준다.

영화는 영화다. 현실비판적 영화를 만들지만 봉 감독도 “영화가 직접 사회를 바꾼다고 믿지 않는다. 영화는 영화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영화가 시대의 산물이라든지, 영화 자체의 정치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 자꾸 현실 정치의 프레임을 들이대고, 영화적 자율성 대신 도구화하려는 어떤 경향을 반대·우려하는 것이다. 동시에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 극단화하는 일부 영화들의 문제도 있다. 영화를 영화로 보는 것, 영화에게 영화의 자리를 주고 다른 무언가의 이름으로 어지럽히지 않는 것.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만큼 중요한 일 아닐까 한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