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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 논설위원이 간다

“그 당에선 할 일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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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손학규 스마트폰 속 지인들 문자 보니

하태경 최고위원이 지난 24일 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손학규 대표에게 사과하고 있다. 하 최고위원은 전날 손 대표를 겨냥해 ’나이 들면 정신이 퇴락한다“고 공격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연합뉴스]

하태경 최고위원이 지난 24일 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손학규 대표에게 사과하고 있다. 하 최고위원은 전날 손 대표를 겨냥해 ’나이 들면 정신이 퇴락한다“고 공격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연합뉴스]

“막걸리나 한잔합시다.”

미련 없이 나오라지만 #손 대표는 퇴진 압박 버티기 #“사퇴하면 중도의 길 사라져 #곧 유승민 만나자고 할 것”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번개’제안이었다. 당 상황이 궁금해 지난 27일 전화를 걸어 “내일 사무실로 찾아갈 테니 차나 한잔 달라”고 했는데 막걸리 얘기를 꺼냈다. 오죽 속이 답답했으면. 나는 손 대표가 2010년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 대표일 때 출입기자였다. 결국 이날 밤 8시.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누런 막걸리 주전자와 취재 수첩을 동시에 테이블 위에 놓고 손 대표를 만났다. 손 대표는 요즘 매일 퇴진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이 와중에 51세의 하태경 최고위원(재선)에게 얼마 전 “나이 들면 정신이 퇴락(頹落)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두어 달 전엔 40대 이언주 의원에게 “찌질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손 대표는 72세다. 나이 어린 정치인들에게 ‘찌질’ ‘정신 퇴락’ 같은 말까지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지난 26년간 정치를 하면서 국회의원으론 4선을 기록했고, 장관(보건복지부)·경기도지사에 이어 정당 대표만 이번이 세 번째인 손 대표다.

하지만 하태경·이언주 의원의 말이 비록 수준을 의심케 하는 것이긴 해도, 이들과 공방을 벌이는 손 대표의 모습 또한 과히 보기 좋은 건 아니라는 시선이 존재한다.

대표 자리에 너무 연연해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
“나더러 욕심낸다고들 하는 걸 안다. 다음 총선까지 바른미래당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왜 붙들고 늘어지냐는 비난· 조롱· 비아냥도 있고. 아이고 거 참 내가….”

이 대목에서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지인들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몇 개 보여줬다. 한 메시지에는 ‘고귀한 인품을 더는 손상하지 말고, 치욕적인 수모에서 벗어나…’라고 적혀 있었다. 또 다른 문자 메시지의 내용은 내가 읽어도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미련 가지지 말고 오늘 중으로 의원들과 의논해 당 대표 내려놓는 게 그나마 깔끔할 거 같네. 그 당에선 할 일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네.’

충고대로 하실 생각은 없나.
“사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싶다. (2010년) 민주당 대표할 때 최고위원회에 정말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있었지 않나. 정동영·정세균·박지원(원내대표)·박주선·이인영·천정배…. 최고위원 전원이 당수급이었지. ‘그때도 했는데, 지금 못하랴’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심하다. 그러나 그만두지 않는 게 아니라 못 그만두는 것이다. ‘중도정당’, 이게 반드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양당체제의 원심력이 강하게 엄습하고 있다. (반대파 생각은) ‘여기서 국회의원 될 수 있겠어? 이쪽이나 저쪽이나 가야 되는 것 아냐?’ 이것 아닌가. (내가 사퇴하고) 바른미래당이 흩어지면 제3지대, 중도의 길이 망가진다. 그래서 못 그만둔다.”

사실 손 대표 거취는 내년 총선의 구도와 직결돼 있다. 바른미래당에는 세 개의 원내 그룹이 있다.

① 손 대표와 호남계 의원들=박주선·주승용·김동철·김관영 등 ②바른정당 출신 지역구 의원 8명=유승민·정병국·이혜훈·오신환·하태경·지상욱·유의동·정운천 ③‘안철수 없는 안철수계’(이하 안철수계)비례대표 의원 6명=김삼화·김수민·김중로·신용현·이동섭·이태규.

외형상 ‘유승민계+안철수계’(②+③)가 연합해 손 대표를 내려오라고 협공을 하는 중이다. 손 대표가 절대 불리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유승민+안철수계’는 슈팅은 많이 해도 골은 못 넣은 축구팀과도 비슷하다. 바른미래당 당헌·당규상 대표를 불신임할 수 있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유승민+안철수계’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압박해도 손 대표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이상 달라지는 건 없다.

손 대표가 물러나면 유승민계가 당권을 접수해서 자유한국당과 ‘당 대 당 통합’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안철수계 비례대표 의원들도 대체로 같은 입장일 수 있다. 이들은 세종(김중로)·서울 강남(김삼화)·용인(이동섭) 등지로 내년 총선 출마지역을 확정한 상태다. 이들 또한 ‘보수통합’이 절실하다는 점에서 유승민계와 이해관계가 같다.

하지만 손 대표는 ‘중도실용’ 정당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버티는 중이다. 결국 유승민계 8명은 ▶각자도생(各自圖生·개별적으로 한국당 입당)하거나 ▶신당 창당(집단 탈당 후 새로 당을 만들었다가 통합 추진)을 하거나 ▶손 대표와 타협하는 길밖에는 없는 상황이다. 앞의 두 가지 시나리오는 모두 위험이 따른다.

실제로 유승민 의원의 측근인 조해진·류성걸 전 의원은 바른미래당 탈당 후 한국당 복당을 시도했다가 거부당했다. 신당 창당은 공사가 너무 크다. 더군다나 안철수계 의원들은 대부분 비례대표라 탈당 시 의원직을 잃는다. 혹 신당을 만들었는데 통합이 안된다면 어떻게 될까.

◆주목되는 혁신위 카드=그래서 세번째, 양측이 타협해서 출구를 마련하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혁신위원회’(이하 혁신위) 카드다.

정당의 ‘혁신위’는 이제 ‘비대위’와 함께 종종 갈등·위기 국면에서의 승부수로 등장하고 있다. 당초 손 대표도 내분 수습책으로 혁신위 카드를 꺼내 들었으나 ‘유승민+안철수계’가 거부했다. 이젠 ‘안철수+유승민계’가 거꾸로 손 대표에게 혁신위를 받으라고 압박하고, 손 대표가 거부하고 있다. 오신환 원내대표는 29일 기자들과 만나 “혁신위가 기득권을 내려놓는 결정안을 내면 그게 혁신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지도부 거취’를 혁신위로 끌고 가겠다는 생각인 셈이다. 먼저 혁신위 카드를 꺼냈던 손 대표가 난색 하는 이유다.

결국 당분간 양측의 대립지점은 혁신위가 어느 선까지 활동하느냐를 두고 벌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혁신위가 대표 퇴진을 전제로만 하지 않는다면 극적으로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다.

혁신위는 잘만하면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다. 지금까지 두 번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도 있다.

첫 번째는 지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김상곤(전 교육부장관) 혁신위’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2·8전당 대회에서 대표로 뽑힌 뒤 두 달 만에 치러진 재·보선에서 완패하는 바람에 몇달 동안을 계속 비주류의 퇴진 공세에 시달렸다. 지금의 바른미래당 상황과 비슷했다.

당시 문 대통령이 퇴진 공세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뽑아 든 카드가 ‘혁신위’였다. 당 외부인사였던 김상곤 전 교육부장관이 위원장을 맡았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혁신위원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 혁신위는 10차례에 걸쳐 혁신안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현역의원의 의정활동을 평가해 하위 20%를 물갈이하는 공천 룰이었다. 혁신안을 토대로 민주당은 총선에서 제1당에 올랐다. 혁신안에 반발해 비주류의 집단 탈당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절반 이상의 성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성공사례가 2001년 새천년민주당의 ‘당 쇄신과 발전을 위한 특별대책위’(쇄신특대위·위원장 조세형, 간사 김민석)다. 쇄신특대위 또한 당내 갈등의 산물이었다. 비주류 쇄신파가 주류 동교동계와 당권을 놓고 싸우다 쇄신특대위 구성에 합의했다.

쇄신특대위는 먼저 당 총재제도를 폐지했다. 공천권을 손에 쥔 ‘제왕적 총재’가 이때 민주당에서 사라지고, ‘대표+최고위원’의 현 체제로 바뀌었다. 지금 모든 정당의 지도체제가 당시 쇄신특대위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정당사상 처음으로 ‘국민참여경선제’(일반 국민이 선거인단의 50%)를 도입했다. 그 결과는 ‘노풍’(노무현 지지 바람)으로 이어졌고, 노풍은 정권 재창출의 바탕이 됐으니, 쇄신특대위야말로 대박을 쳤다고 할 수 있다.

◆손-유 회동할까=이처럼 잘만 가동하면 혁신위는 정파의 이해와는 별도로, 활동 자체가 정당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는 모델이다. 그러나 바른미래당이 접점을 찾을지는 미지수다. 손 대표 측은 반대파가 혁신위에서 대표 거취를 다루려고 ‘꼼수’를 부린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결국 끝없는 내분 상황에서 출구를 찾으려면 당내 리더들끼리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다. 마침 유 의원은 얼마 전 동국대 특강에서 “손 대표와 필요하면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손 대표에게 “유승민 전 대표를 만나볼 생각은 없느냐”고 했더니 “얼마든 만날 수 있다. 연락해 볼 것”이라고 했다. (손 대표를 만나고 난 뒤 유 전 대표의 입장을 듣기 위해 전화해봤으나 해외출장 중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손 대표와 유 전 대표는 근래 별도로 소통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당의 존립을 놓고 노선투쟁이 가열되고 있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당에서 그렇게 불통이었다는 점이 놀랍다. 이런 국면에서 창업주인 안철수 전 대표도, 독일에 있다지만  나몰라라 하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강민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