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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정치개혁 :‘12·15 합의’로 돌아가라(II)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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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김대중도서관장

박명림 연세대 교수·김대중도서관장

최고의 명의는 진단과 수술 모두에서 탁월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확한 진찰과 예리한 집도가 만나면 깊은 상처도 깨끗이 치유된다. 나라를 치료하는 명의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홍역을 치른, 그리하여 재조(再造) 한국을 다짐한 우리였다. 지금은 재조냐 실패냐의 기로다.

12·15합의는 민주화 이후 최대합의 #대결의 정치 대신 타협의 정치 계기 #선거개혁과 헌법개혁 대교환으로 #지양과 타협, 통합과 안정의 나라를

한국사회는 대립과 적대의 철학과 정치는 존재하지만 타협과 관용의 철학과 정치는 부재한다. 철학과 정치 모두에서 이 땅에는 서로 배척적인 두 정의와 두 진영의 논리는 존재하나 정의와 정의, 진영과 진영을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하는’ 지양과 통합의 사유와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양과 통합의 철학 및 정치의 부재, 이 실제상황은 한국사회와 인간문제의 특성과 한계를 관통하는 최대 본질이다. 초기의 좌익과 우익, 공산과 민주의 생사투쟁과 이후 독재와 민주의 대결을 거쳐 오늘날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적대와 증오가 만연한다.

그런 철학과 정치를 더욱 악화시키는 주범은 독임과 배척, 독점과 배제의 논리 위에 구축된 권력구조와 선거제도다. 똑같은 작동논리를 갖는 권력질서 위에 단지 진영과 역할 주체만이 5년 주기로 바뀔 뿐이다. 하여 권력의 장악과 상실은, 국가봉사 기회의 진퇴를 넘어 반대방향으로의 쏠림으로 인한 복수와 죽음의 갈림길이 된다.

사회갈등의 지표 역시 OECD 최악 수준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시위의 숫자는 민주화 이전에 비해 결코 줄지 않았다. 그만큼 갈등과 대결은 완화되지 않고 있다. 저주와 낙인으로 범벅된 정치언어들은 험악하고 상스러우며, 거리는 노상 시위와 외침으로 넘쳐난다. 근본문제는 해결은커녕 계속 미루어지고 더욱 악화된다.

우리 지도자들은 이 잘못된 뿌리와 줄기를 뜯어고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갖은 곁가지 궁리와 방책들을 구사하려 분투한다. 뿌리와 줄기가 병들었는데 가지와 잎이 튼튼할 수는 없다. 그런 나무에 튼실한 과실이 맺어질 리도 없다. 개혁의 과정조차 지양과 타협은 배제한 채 자신의 교의와 정의를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2018년 12월 15일의 합의는 1987~88년의 역사적인 민주화 돌파 이후 모든 주요 정당들이 참여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타협이었다. 과정은 물론 결과도 대결과 적대를 넘는 경로를 안출할 수 있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촛불광장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6월항쟁 이후 최대 사태가 제공한 헌법개혁과 정치개혁의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가까운 미래에 이토록 중요한 헌법과 정치개혁의 순간이 다시 올까. 불가능하다. 2020년 총선 이후는 곧 대선 국면으로 진입할 것이며, 이대로 가면 그 이후에는 촛불과 탄핵으로 크게 요동쳤던 쏠림과 적대의 대치구도가 더 나쁘게 복원되며 지속될 것이다.

이 황금의 기회를 날려버려선 안된다. 노상 치고받는 적대와 대결의 최고 갈등국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도 안된다. 국정농단,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 조기대선이라는 파동을 치르고도 국가구조 개조는커녕 그저 한 진영의 적폐청산에만 그친다면 이는 너무나 허무한 귀결이자 개혁기회 망실의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안된다.

일반적으로 연립과 연정을 수반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독임과 독재가 불가능한 제도다. 그걸 독재라고 비판하며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자세는 민주주의 근본원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만약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독재제도라면, 보수정당 자신들을 포함해, 한국의 5대 민주정당이 모두 독재선거제도 도입을 적극 검토하기로 합의하였다는 자기모순이 된다. 연동형은 사표를 방지하고 비례성을 보장하는 공정한 민주적 선거제도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그러나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된 4당합의의 준 연동형은 표의 부등가성 문제 때문에 반드시 재고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당연히 12·15합의의 후속 논의에 참여했어야 한다. 그러면서 12·15합의대로 선거제와 권력구조 개혁의 연계를 추구했어야 한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협상탁자로 돌아와 헌법개혁과 선거개혁을 논의해야 한다. 대화는 자신들이 합의하였던 국회선진화법의 근본정신이다. 또 의회민주주의의 본령이다.

반대로 연정, 동거정부, 대연정, 총리지명권 이양을 제안·실현하여 협치와 통합이 가능한 나라를 만들고자 꿈꾸었던 노무현의 헌법개혁·정치개혁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훨씬 온건한 의회의 총리 복수추천제조차 내각제라며 거부하는 집권세력 역시 고루하기는 마찬가지다. 연동형은 추진하면서 대통령 권력독임은 고수하겠다는 구상도 자가당착이다. 10주기를 맞는, 노무현의 올곧은 개혁철학에 대한 부정이다.

4당과 자유한국당은 대교환을 통해 헌법개혁과 선거제 개혁을 이루어, 고질적인 대결과 적대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자. 그리하여 자기와 상대, 나라와 국민이 모두 상생하는 지양과 통합의 정치로 나아가자. 지양은 타협을, 통합은 안정을 준다. 지금은 그 비약을 이룰 다시 오기 어려운 절호의 기회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김대중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