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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고문 두렵지 않다"…안중근, 러시아신문에서도 '영웅'

중앙일보

입력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르포 기사 형태로 상세하게 다룬 러시아 신문 '쁘리아무리예'의 보도 내용. [국가기록원]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르포 기사 형태로 상세하게 다룬 러시아 신문 '쁘리아무리예'의 보도 내용. [국가기록원]

"1910년 2월 14일. 이토 공의 암살자 안(중근)에 대한 사형이 선고됐다. 암살자는 극도로 안정돼 보였다. 그는 평소처럼 먹고 잠을 잤으며, 처음부터 마음을 굳게 먹고 거사에 임한 것으로 보였다. 그의 어머니는 가족에 누를 끼치지 말고, 가치있게 죽음을 맞으라는 부탁과 함께 마지막 헤어짐의 인사말을 그에게 보냈다." <러시아신문 '쁘리아무리예' 1910년 2월 27일자 사회면>

1909~1910년 보도된 러시아신문 기사 24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에 대한 긍정적 평가 #안 의사의 의연한 영웅적 모습도 집중 보도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경기도 성남시)이 28일 공개한 러시아신문 '쁘리 아무리예'에 게재된 기사의 한 대목이다. 이 기사에는 "안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뒤 한 시간 동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고, 방청객 모두가 그의 얘기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고 기술됐다.

국가기록원은 2015년부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크·하바로프스크 등 극동 지역에서 1909~1910년 발간된 신문을 집중적으로 수집해 안 의사와 관련된 기사 24건을 찾아냈다. 그간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다룬 중국·일본 신문 기사가 공개된 적이 있다. 러시아의 신문 기사도 한 두 건씩 공개됐다. 24건 공개는 이례적이다.

당시 러시아의 여러 신문은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일(1909년 10월 26일) 다음날인 27일 보도를 시작했다. 체포 과정, 재판 상황은 물론 사형집행일(1910년 3월 26일) 이후 한달여 뒤인 4월 21일까지 계속 보도했다.

쁘리아무리예 신문 1909년 11월 2일자는 안 의사와 함께 거사를 도모한 우덕순·조도선이 러시아 차이쟈고우 우편열차 정거장에 도착한 순간을 보도했다. 또 안 의사가 의거 전날 혼자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떠나면서 서로 큰 절을 하며 작별인사하는 모습 등을 생생하게 다뤘다.

또 안 의사가 체포된 뒤 일본 총영사관 심문관 앞에서 진술한 내용을 비중있게 실었다. 기사에는 "안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는 죽으면서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라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김형국 국가기록원 연구협력과장은 "당시 러시아 지역사회에서 안 의사를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영웅'으로 표현하며 하얼빈 의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차역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곳이다. [연합뉴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차역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곳이다. [연합뉴스]

또 다른 신문인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 1910년 4월 21일자에는 안 의사의 매장지를 언급한 기사가 게재됐다. 사형 직후 안 의사의 시신을 교도소 안의 예배당으로 옮겼다가 같은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매장했다는 내용이다. 종전에는 의사가 교도소 안의 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과장은 "안 의사의 매장지를 처음 보도한 매체는 일본 아사히신문인데, 해당 기사에는 '기독교 묘지'라는 표현이 없다. 안 의사가 천주교도라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정부와 학계에서 매장지를 추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스토치나야 자랴' 신문은 안 의사가 체포된 뒤 심문을 받으며 의연하고 품위있는 모습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기사에서는 "암살자 안은 심문에서 '이것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다.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쁘고 내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 "판단컨데 암살자는 지식인이고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보인다"라고 보도하면서 안 의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그동안 하얼빈 의거에 대해 잘 알려진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뿐아니라 사전 준비와 사후조치, 의거에 대한 러시아인의 인식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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