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배송 시대의 역설 "쉴 새 없이 팔리는 ' 한 달 뒤 받는 가방' "

중앙일보

입력 2019.05.28 10:01

업데이트 2019.05.28 14:21

홍정우 하고 대표. [사진 하고]

홍정우 하고 대표. [사진 하고]

‘패션 제품을 고른 뒤 펀딩에 성공하면 한 달 뒤 받아보기’
한밤중에 우유 한 팩을 주문해도 다음 날 새벽 배송해 주는 시대, 과연 될까 싶은 사업이다. 세상에 없는 제품이면 또 모를까, 어딜 가나 살 수 있을 것 같은 옷이나 가방이다. 그런데도 온라인 패션 플랫폼 ‘하고’(HAGO)는 이런 느린 패션에 도전해 성과를 내고 있다. 이 회사가 제안하는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나온 의류나 가방은 받아보기까지 한 달 혹은 그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가령 현재 펀딩 상품으로 올라와 있는 여름 블라우스는 지난 22일 펀딩을 시작해 다음 달 4일 마감한다.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사람이 모이면 이때서야 제작에 들어간다. 다음 달 10일 이후에 배송을 시작할 예정이라 구매자가 옷을 입을 수 있는 시점은 그 이후다.

현재 진행되는 펀딩 제품. 초기 물량을 제작할만큼 펀딩이 되면 제작에 들어간다. [하고 홈페이지 캡처]

현재 진행되는 펀딩 제품. 초기 물량을 제작할만큼 펀딩이 되면 제작에 들어간다. [하고 홈페이지 캡처]

소비자는 왜 이런 불편을 감수할까. 지난 21일 홍정우(45) 하고 대표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나 비결을 물었다. 1년 테스트 기간을 거쳐 지난해 9월 본격적으로 가동된 하고는 운영 몇 개월 만에 패션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온라인 업체로 떠올랐다. 대표 상품인 ‘하고백’ 이 히트를 하면서 상업적 성공 가능성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고백 중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43차 재주문을 달성해 약 4300개를 팔았다. 지난해 32억원에 불과했던 연 매출은 올해 상반기 40억원을 찍으면서 연 매출 100억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현재는 160개의 브랜드가 펀딩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큐레이션 숍에는 360여개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SK네트웍스 패션사업 본부 출신인 홍 대표는 클럽 모나코와 같은 유명 해외 브랜드를 한국으로 들여오거나 디자이너 브랜드 인수합병(M&A)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 SK가 패션 부문을 매각한 뒤 퇴사해 2017년 하고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인터뷰] 패션 플랫폼 '하고' 홍정우 대표
크라우드펀딩으로 재고 없애고
재료비 등 생산 원가 투명 공개

왜 이런 플랫폼을 만들었나.  
잘 알려져 있듯이 패션 제품 소비가는 원가의 5~6배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패션 회사의 영업이익률은 10% 미만이다. 말이 안 되는 사업인데도 하는 것이다. 재고와 유통 비용 때문에 인기 있는 브랜드는 절반 혹은 40%만 제값을 받고 팔고 나머지는 재고가 된다. 고스란히 손해다. 패션 회사가 이런 부분만 맞춰 생산해도 효율 높은 비즈니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창업했다.
소비자가는 높은데 패션 회사는 계속 어렵다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실력 있는 디자이너가 창업한 뒤 잘되면 잘될수록,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빚을 지게 되는 구조다. 백화점 중심 유통으로 성장한 한국 패션계의 한계다. 디자이너가 제품을 만들고 판매해 회수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늘 자금 조달이 어렵다. 한국 시장이 작아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진출하기엔 너무 정보가 없다. 한국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불리한 조건에 계약을 맺는 등 사기를 많이 당하기도 한다.   
펀딩 '효자 상품'으로 꼽히는 하고 새들백.[하고 홈페이지]

펀딩 '효자 상품'으로 꼽히는 하고 새들백.[하고 홈페이지]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한국에서 독자 브랜드가 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진 디자이너가 200억~300억원 매출 규모의 회사를 키우려면 드는 비용, 시드머니는 약 70억원 정도인 것 같다. 막 시작하는 디자이너에겐 7000만원도 없을 텐데 당연히 독자 브랜드를 키우기 어렵다.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성공한 고유 브랜드가 없는 이유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많은데 고전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는 막 시작한 국내 디자이너 창업 브랜드를 입점시킨 큐레이션 섹션을 운영하고 있다. 소비자가 너무 오래 고르지 않도록 제한된 상품만 취급한다는 방침이다. 홍 대표는 하고를 “디자이너 인큐베이팅 플랫폼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패션 오픈 마켓과 차별화를 위해 브랜드 디자인 철학, 정체성이 불분명한 제품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주목할만한 디자이너를 발굴해 입점을 제안하는 것이 업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고는 이들의 브랜딩과 각종 계약, 마케팅 등을 해주는 대신 수수료(25~30%)를 받아 수익을 내고 있다.

하고백의 제작 비용. 원단 2만8200원 등 항목별로 볼 수 있도록 정리돼 있다. [하고 홈페이지]

하고백의 제작 비용. 원단 2만8200원 등 항목별로 볼 수 있도록 정리돼 있다. [하고 홈페이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와디즈나 다른 패션 회사도 패션 용품 펀딩을 하는데 차이가 있는 것인지.  
콘셉트가 다르다. 와디즈는 실용적인 제품을 추구하고 우리는 보다 패션 그 자체에 집중한다. 와디즈가 유니클로라면 우리는 코스(COS)나 씨어리(Theory)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타 패션 업체도 펀딩을 시도하는데, 펀딩 성공률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높다. 

하고 큐레이숍 입점 브랜드 블라우스를 입은 가수 아이유. 하고는 입점 업체 마케팅을 대행하는 디자이너 인큐베이팅 플랫폼 역할도 한다. [사진 하고 홈페이지]

하고 '아이유 블라우스' [사진 하고 홈페이지]

하고는 테스트 기간을 포함해 현재까지 100여건의 펀딩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최대 6주를 기다리겠다는 소비자가 얼마나 있을까 고민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많았다는 설명이다. 초기에 무산되는 펀딩도 있었지만 이내 안정화됐다. 원단 등 재룟값, 가공비, 마케팅 비용, 수수료, 배송료 등 생산 원가를 모두 공개해 적정한 가격이라는 점을 강조한 게 적중했다는 분석이다. 현재는 예상 유통가와 하고가를 비교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마케팅하고 있다. 하고 큐레이션 숍 판매 제품의 반품률이 낮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펀딩 제품 중에도 생산 원가를 공개하지 않은 제품도 있던데 왜 그런 것인지.  
다른 플랫폼에 입점한 브랜드는 항목별 공개를 꺼린다. 항의가 들어올 수 있어서다. 하지만 점점 늘어갈 전망이다. 오는 가을·겨울(FW) 시즌부터는 우리가 생산에서부터 관여한 브랜드 제품이 대거 펀딩을 시작한다. 원가 공개를 조건으로 펀딩을 진행할 예정이라 투명한 펀딩을 더욱 늘릴 수 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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