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제품을 고른 뒤 펀딩에 성공하면 한 달 뒤 받아보기’
한밤중에 우유 한 팩을 주문해도 다음 날 새벽 배송해 주는 시대, 과연 될까 싶은 사업이다. 세상에 없는 제품이면 또 모를까, 어딜 가나 살 수 있을 것 같은 옷이나 가방이다. 그런데도 온라인 패션 플랫폼 ‘하고’(HAGO)는 이런 느린 패션에 도전해 성과를 내고 있다. 이 회사가 제안하는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나온 의류나 가방은 받아보기까지 한 달 혹은 그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가령 현재 펀딩 상품으로 올라와 있는 여름 블라우스는 지난 22일 펀딩을 시작해 다음 달 4일 마감한다.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사람이 모이면 이때서야 제작에 들어간다. 다음 달 10일 이후에 배송을 시작할 예정이라 구매자가 옷을 입을 수 있는 시점은 그 이후다.
소비자는 왜 이런 불편을 감수할까. 지난 21일 홍정우(45) 하고 대표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나 비결을 물었다. 1년 테스트 기간을 거쳐 지난해 9월 본격적으로 가동된 하고는 운영 몇 개월 만에 패션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온라인 업체로 떠올랐다. 대표 상품인 ‘하고백’ 이 히트를 하면서 상업적 성공 가능성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고백 중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43차 재주문을 달성해 약 4300개를 팔았다. 지난해 32억원에 불과했던 연 매출은 올해 상반기 40억원을 찍으면서 연 매출 100억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현재는 160개의 브랜드가 펀딩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큐레이션 숍에는 360여개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SK네트웍스 패션사업 본부 출신인 홍 대표는 클럽 모나코와 같은 유명 해외 브랜드를 한국으로 들여오거나 디자이너 브랜드 인수합병(M&A)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 SK가 패션 부문을 매각한 뒤 퇴사해 2017년 하고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인터뷰] 패션 플랫폼 '하고' 홍정우 대표 #크라우드펀딩으로 재고 없애고 #재료비 등 생산 원가 투명 공개
- 왜 이런 플랫폼을 만들었나.
- 잘 알려져 있듯이 패션 제품 소비가는 원가의 5~6배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패션 회사의 영업이익률은 10% 미만이다. 말이 안 되는 사업인데도 하는 것이다. 재고와 유통 비용 때문에 인기 있는 브랜드는 절반 혹은 40%만 제값을 받고 팔고 나머지는 재고가 된다. 고스란히 손해다. 패션 회사가 이런 부분만 맞춰 생산해도 효율 높은 비즈니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창업했다.
- 소비자가는 높은데 패션 회사는 계속 어렵다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 실력 있는 디자이너가 창업한 뒤 잘되면 잘될수록,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빚을 지게 되는 구조다. 백화점 중심 유통으로 성장한 한국 패션계의 한계다. 디자이너가 제품을 만들고 판매해 회수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늘 자금 조달이 어렵다. 한국 시장이 작아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진출하기엔 너무 정보가 없다. 한국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불리한 조건에 계약을 맺는 등 사기를 많이 당하기도 한다.
-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한국에서 독자 브랜드가 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신진 디자이너가 200억~300억원 매출 규모의 회사를 키우려면 드는 비용, 시드머니는 약 70억원 정도인 것 같다. 막 시작하는 디자이너에겐 7000만원도 없을 텐데 당연히 독자 브랜드를 키우기 어렵다.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성공한 고유 브랜드가 없는 이유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많은데 고전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는 막 시작한 국내 디자이너 창업 브랜드를 입점시킨 큐레이션 섹션을 운영하고 있다. 소비자가 너무 오래 고르지 않도록 제한된 상품만 취급한다는 방침이다. 홍 대표는 하고를 “디자이너 인큐베이팅 플랫폼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패션 오픈 마켓과 차별화를 위해 브랜드 디자인 철학, 정체성이 불분명한 제품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주목할만한 디자이너를 발굴해 입점을 제안하는 것이 업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고는 이들의 브랜딩과 각종 계약, 마케팅 등을 해주는 대신 수수료(25~30%)를 받아 수익을 내고 있다.
-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와디즈나 다른 패션 회사도 패션 용품 펀딩을 하는데 차이가 있는 것인지.
- 콘셉트가 다르다. 와디즈는 실용적인 제품을 추구하고 우리는 보다 패션 그 자체에 집중한다. 와디즈가 유니클로라면 우리는 코스(COS)나 씨어리(Theory)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타 패션 업체도 펀딩을 시도하는데, 펀딩 성공률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높다.
하고는 테스트 기간을 포함해 현재까지 100여건의 펀딩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최대 6주를 기다리겠다는 소비자가 얼마나 있을까 고민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많았다는 설명이다. 초기에 무산되는 펀딩도 있었지만 이내 안정화됐다. 원단 등 재룟값, 가공비, 마케팅 비용, 수수료, 배송료 등 생산 원가를 모두 공개해 적정한 가격이라는 점을 강조한 게 적중했다는 분석이다. 현재는 예상 유통가와 하고가를 비교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마케팅하고 있다. 하고 큐레이션 숍 판매 제품의 반품률이 낮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 펀딩 제품 중에도 생산 원가를 공개하지 않은 제품도 있던데 왜 그런 것인지.
- 다른 플랫폼에 입점한 브랜드는 항목별 공개를 꺼린다. 항의가 들어올 수 있어서다. 하지만 점점 늘어갈 전망이다. 오는 가을·겨울(FW) 시즌부터는 우리가 생산에서부터 관여한 브랜드 제품이 대거 펀딩을 시작한다. 원가 공개를 조건으로 펀딩을 진행할 예정이라 투명한 펀딩을 더욱 늘릴 수 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