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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뉴스] "이번엔 내 암송아지 가져가유" 34년 릴레이 기증

중앙일보

입력

충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30년 넘게 이웃 간에 암송아지를 릴레이로 기증해오고 있다. 기증받은 암송아지를 키워 이 소가 암송아지를 낳으면 이웃에게 선물하는 방식이다. 서산시 지곡면에 사는 주민들 얘기다.

지난 24일 한만성 서산시 지곡면장이 김기헌씨(가운데)에게 송아지 사육 지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김씨가 기증받은 송아지는 옆마을 주민 정병욱씨가 기증한 것이다. [사진 서산시]

지난 24일 한만성 서산시 지곡면장이 김기헌씨(가운데)에게 송아지 사육 지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김씨가 기증받은 송아지는 옆마을 주민 정병욱씨가 기증한 것이다. [사진 서산시]

지난 24일 지곡면 대요리에 사는 정병욱(69)씨는 자식같이 정성 들여 키운 송아지를 이웃인 산성리 김기헌(68)씨에게 전달했다. 3년 전 암송아지를 이웃에게서 받은 정씨는 어미 소로 키운 뒤 암송아지를 낳을 때까지 정성을 다했다.

1986년 출향 기업인들이 송아지 보내면서 시작 #전국 대부분 지역 명맥 끊겼지만 지곡면은 유지 #주민들 "아름다운 전통 덕분에 도움됐다" 반겨

몇 달 전 어미 소가 암송아지를 낳자 그는 면사무소에 기증할 곳을 찾아달라고 연락했다. 자신이 받은 것처럼 암송아지를 이웃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해진 송아지의 새 주인이 김기헌씨다.

이날 암송아지를 받은 김씨는 “새 식구를 맞아서 너무 기쁘다”며 “송아지를 잘 먹이고 잘 키워서 3년 뒤엔 다른 이웃에게 튼실하고 예쁜 송아지를 선물할 것”이라고 말했다.

암송아지 기부는 1980년대 고향을 떠난 기업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붐이 일었던 ‘고향에 송아지 보내기 운동’이 시작이다. 당시만 해도 소 한 마리가 농가에서는 보물 1호일 정도로 큰 재산이었다. 농가 소득을 높이자는 취지로 시작한 운동은 전국 대분 지역에서 명맥이 끊겼지만, 지곡면에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곡면에서는 1986년 마을 출신 사업가 3명이 고향 농가를 돕기 위해 암송아지 3마리를 기탁하면서 시작했다. 송아지를 받은 농가는 어미 소로 키운 뒤 암송아지를 낳으면 한 마리씩을 다른 이웃에게 전달했다.

지난해 3월 이경식 서산시 지곡면장(왼쪽)이 이기자씨(가운데)에게 송아지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서산시]

지난해 3월 이경식 서산시 지곡면장(왼쪽)이 이기자씨(가운데)에게 송아지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서산시]

기탁받은 암송아지가 어미 소로 자라 암송아지를 낳으면 주민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재산 규모 등을 확인한 뒤 면사무소에서 기탁자로 확정한다. 올해까지 40개 농가가 혜택을 주고받았다.

암송아지를 어미 소로 키우는 데는 3년가량이 걸린다. 암송아지가 아닌 수송아지가 태어나면 분양받은 농가가 송아지를 팔아 다음 기부 농가에 암송아지를 사주는 방식으로 릴레이가 이어진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공수정을 통해 송아지가 태어나 소를 사서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산성리 박상호 이장은 “나도 20년 전 송아지를 받으면서 소를 사육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30여 마리로 늘었다”며 “우리 마을의 아름다운 전통 덕분에 큰 살림 밑천을 얻었다”고 말했다.

먹을 게 부족하고 농기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고향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한 송아지 기증이 30년 넘도록 주민간 정을 돈독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암송아지 나눔은 농협으로도 확산했다. 농협 서산지부는 2012년 ‘희망 송아지 릴레이 분양’이라는 이름으로 다문화 가정에 암송아지 한 마리를 지원했다. 어미 소로 자란 송아지가 새끼를 낳자 또 다른 다문화 가정으로 전달됐다.

한만성 지곡면장은 “송아지 보내기 운동의 명맥을 유지한 곳은 전국에서 우리가 유일할 것”이라며 “이런 미풍양속이 계속돼 농가 소득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서산=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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